실질객관동화 76화: 자리양보를 보고 떠오른 생각.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난 개인적으로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약해보이는 사람이 서서 가면 좌불안석이 된다. 왠만하면 노약자석은 자리가 비어있어도 눈치보이지 않나? 만화 보면 감상글도 대개 비슷한 정서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왠만해서는 앉으라고 하고 비켜주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 마음 편하려고 비키는 거지 무슨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앉으라고 얘기하기는 좀 쪽팔리더라. 모르는 사람한테 말 거는 것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노인이 아닌 임신부한테 양보하려고 그랬다가는 잘못하다 멀쩡한 여자(?) 임신부로 착각해서 서로 민망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현장경험을 통해 익힌
나같은 성격이상자를 위한 자리양보 방법을 소개해본다.
1. 기초편: 거리와 속도, 각도와 장애물을 고려한다버스나 지하철에 운좋게 앉았다. 그런데 할아버지/할머니/장애인/임산부가 (이하 표적) 승차했다! 슬슬 엉덩이가 따끔거리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주변 연놈 아무도 안 일어선다, 피곤해 죽겠는데. 에이, 어쩔 수 없다. 염치와 피로의 싸움에서 염치가 승리한 당신은 자리를 양보하기로 한다.
그러나 츤데레에 낯가림증인 당신은 이때 '앉으세요' 소리 하지 않고 표적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 이럴 때는 크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A. 거리: 가장 중요하다. 자리를 비우면 사회통념상 표적이 (몽빼바지 아주머니 수준의 축지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앉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야 한다. 바로 앞에 서있다면 가장 좋다. 이 거리를 맞추지 못하면 왠 시퍼렇게 젊은 연놈이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통탄할 일이 벌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한다.
B. 속도: 표적이 아직 이동 중이라면 현재의 속도로도 자연스럽게 와서 앉을 만한 속도인지 고려한다. 표적의 속도는 다른 승객보다 느리다는 것을 기억하고 되도록이면 바로 앞에 오려는 순간 일어선다.
또한, 저 위대한 뉴턴 경이 정리하신 관성의 법칙을 기억하야 버스나 지하철의 움직임이 표적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계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버스 뒤편 자리에 앉았는데 할아버지가 타셨다고 하자. 앞에 노약자석은 다 젖내나는 연놈들이 1톤짜리 엉덩이를 자랑하고 앉았어서 할아버지께서 당신이 앉은 버스 뒤편으로 오신다고 하자. 그러고 있는데 버스가 정차한다면 이 노인네가 휘청 느려지면서 같이 승차한 젊은넘이 먼저 도달하는 수가 있다. 이럴 때 미리 일어선 당신은 젖내 풀풀 나는 젊은넘에게 장유유서의 예를 실현한 꼴이 되고 만다. 당하고 눈물 뿌리지 말고 미리 물리공부를 해두자는 얘기다.
C. 각도와 시선: 표적이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을 때 일어서면 역시 다른 승객이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다. 표적의 시야를 먼저 확인하고 일어서도록.
D. 장애물: 다른 승객이나 기둥 등 장애물이 있으면 속도가 느린 표적은 자리에 제때 못 앉을 수도 있다. 위 A와도 상관이 있는 얘기이므로 참조하라.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표적이 당신의 염치를 알아보았는지 바로 옆에 서서 방석의 바늘 갯수를 급증시키고 있을 때이다. 이런 때에는 초보조차 쉽게 말없이 자리를 양보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쉬운 상황은 표적이 막 옆을 지나려고 폼을 잡고 있을 때이다. 이때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어설 표시를 하면 표적은 멈춰설 것이고, 당신은 직전의 이상적 시나리오에 가까운 상황에서 자리를 비켜줄 수 있다.
고수 츤데레라면 거리가 멀고 장애물이 있어도, 표적의 시선이 이쪽에 향해있고 더 가까운 승객이 딴청피우는 사이 비호같이 양보를 성사시키는 007 작전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시각중추의 특성상 딴청부리던 넘도 움직임에는 반응하기 쉽고, 표적은 일반적으로 속도가 딸리므로 이는 실패위험이 있는 고급 기술에 속한다.
2. 중급 1편: 시선처리에 신경쓴다진정한 츤데레는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실현하려면 말뿐만 아니라 시선과 동작도 잘 처리해야 한다. 아무리 거리와 속도, 각도와 장애물을 잘 고려해서 묵묵히 일어섰다 하더라도 만약 당신의 시선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처럼 표적을 추적하다가 몸은 표적이 도달한 순간 비호처럼 일어섰다면? 표적은 ♪아무말 안해도 알~아 그냥 바라보며~언~ 양보하고 있다는 걸~♪ 하는 심오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필자는 실제로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가 할머니께서 앉아있으라고 말리시는 턱에 쪽팔림을 겪었다. 무릇 쪽팔림 없는 진정한 츤데레 양보법을 실현하려면 표적이 모르게 노리고 있다가 마치 정말 내리는 것처럼 스윽 일어서야 한다.
3. 중급 2편: 변명과 위장의 도본인의 실수나 표적의 동물적인 감으로 인해 양보하려는 의도를 들키고야 말았다면 적절한 변명이 유용할 수 있다. 앉아서 가라고 말리시는 할머니에게 '아, 저 금방 내려요 (생글)' 한 마디 날려드리면 표적인들 어쩌겠는가, 업어치고 메쳐서 자리에 억지로 앉히지는 않겠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일은 못 겪었다.
만약 열여섯 정거장쯤 남았다면 이번에는 위장법을 시행하여 인파 사이에 적당히 몸을 숨기도록 하자. 어차피 도시의 수많은 얼굴 중 하나일 뿐인 당신을 표적은 금방 잊을 것이니 보호색은 충분하다.
4. 중급 3편: 노약자석, 앉을 것인가 말 것인가?사지 멀쩡한 당신이 노약자석에 앉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철학적으로 참 심오한 문제이나, 나의 해답은 간편하다. 버스라면 앉고, 지하철이라면 앉지 말라는 것이다. 버스는 솔직히 서서 가기도 더럽고 설 자리가 그닥 넓지 않아서, 괜히 자리 비우고 서있다가는 통행에 방해만 된다. 앉았다가 노약자가 보이면 일어서주면 그만이다. 지하철은 이런 문제가 덜하므로 노약자석까지 굳이 앉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이유도 있다. 지하철은 박카스 선전 때문인가 노약자석에 잘 안 앉는 분위기인 것 같은데, 버스에서는 위에 얘기한 이유로 모두 자리를 채울 뿐만 아니라 한 번 앉으면 대개 엄청난 엉덩이 무게를 자랑한다. 따라서 당신이 노약자에게 굳이 자리를 비키는 건전한 염치의 보유자라면 노약자석을 미리 차지해놓는 편이 좋다. 필자가 버스타고 다니며 수집한 매우 부정확한 통계자료상 대개의 젊은 것들은 노약자 자리 꿰차고 양보 안하니까, 그 자리에 당신이 앉아있어야 진짜 노약자가 자리를 양보받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5. 고급편: 기차 특별편기차를 타다 보면 입석표를 보유한 승객이 이미 앉아있을 때가 있다. 이때 이미 표를 보여주었는데 상대가 영 힘들어 보인다면 앉아서 가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버스나 전철도 아니고 기차 자리를 양보하면 츤데레인 당신의 적인 생색을 크게 내게 된다. 기차에는 사람이 점점 더 많이 타고 있어서 여기서 일어서면 입석표 보유자가 쉽게 자리를 잡을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1998년 초에 겪은 상황이었다. 기차에 탔는데 내 자리와 옆자리에는 피곤해 보이는 중년 부부가 타고 계셨다. 임자가 안 온 자리에 앉았던 아저씨 쪽이 자리를 비켜주면서 아줌마를 앉게 했고, 본인은 서셨는데 도저히 그 모습을 보며 자리에 앉아 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사용한 방법은 적당한 훼이크였다. 표를 보고 짐짓 깜짝 놀란 필자! '어머, 제가 표에 차칸을 잘못 봤네요. 저는 요 앞칸이 자리니까 앉아서 가세용~' 애드립을 날리고 도주했다. 최소한 다음 역까지는 같이 앉아서 가실 테고, 자리 주인이 찾지 않을 내 자리는 서울 종점까지 앉아가실 테니까.
서울까지 서서 가면서 기분이 뿌듯하거나 보람이 막 넘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상황에서 자리에 앉아 가면 몸은 편할지 몰라도 내 영혼이 쪼그라들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필 외환위기 당시였는데, 그렇게 지쳐보이는 두 분이 기차 좌석에 같이 앉아가는 그 작은 휴식이라도 선물하고 싶었다. 순전 내 의지였으니 억울하거나 따질 것도 없는 건 너무 당연하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해서 배려라는 선물을 주면 그만큼 내 마음이 편해지고 당당해지는 기분이 좋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욕을 해도, 자리 안 비키는 애들이 특별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자리 양보는 권장사항일 뿐 의무가 아니니까. 다만 몸 튼튼한 젊은 사람이 잠시 서서 가는 작은 불편도 참지 못하고 옆에 서서 가는 노약자를 애써 무시하는 것이 안타깝다. 자리 자체는 생색내기 부끄러울 정도로 별것도 아니지만, 그런 작은 마음도 베풀기가 억울할 정도로 우리가 각박하고 여유가 없다는 뜻인 것 같아서 말이지. 마치 지금 이 순간, 지금의 편의가 전부인 것처럼...
6. 해탈편: 츤데레를 넘어서때로는 모든 조건이 악조건일 때가 있다. 표적은 아무리 텔레파시를 보내도 당신 앞이 아니라 엉덩이 1톤짜리 앞에 서있고, 당신과 표적 사이에는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승객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럴 때는 그냥 포기해라.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한 마디 하기가 좀 뻘쭘하기는 해도 쪽팔려 죽을 정도는 아니다. 모름지기 진짜 츤데레 양보쟁이는 츤데레를 초월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리를 비켜주면 좀 불편하긴 할 거다. 다리는 피로를 호소하고, 발은 아프고, 덜컹거리는 차의 움직임에 이사람 저사람에게 본의아니게 들이대며 잠시 후회할 지도 모른다. 표적은 감사하다는 말은커녕 왜 이제야 비켰냐는 듯 노려보며 냉큼 자리를 차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기분이 좀 더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딘가 어깨가 으쓱하고 웃음이 실실 나오지 않는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 이 정도 불편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신이 어딘가 대견하고 자부심이 들지 않는가? 별것도 아닌 희생에 이런 기분을 맛볼 기회는 많지 않다. 그래서 작은 친절은 대상이 누구든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며,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츤데레 양보의 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