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고마운 내 아버지
당신을 이토록 죽도록 증오한 덕에 난 아직
살아있고
증오는 나의 힘
배신하지 않을 나의 아군, 나의 주인 나의 힘...
- 김윤아, '증오는 나의 힘'
막상 시작하려니까 막막하네요. 아빠가 보실 리 없고 보셔도 안 되는 글이지만, 그런데도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글을 쓰려는 사실만으로도 분노와 자책감과 애정 때문에 이래저래 혼란스럽고 불안하네요.
음, 일단 제가 아는 어떤 여자분께 들은 이야기부터 해야겠어요. 이분은 자신의 아버님을 가리켜서 자신의 '적'이었다면서, 살아온 길 한 걸음 한 걸음이 아버님과 싸우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했어요. 참 공감이 가는 얘기였었죠.
자식에게 부모는 곧 세계이죠. 어릴 수록 그래요. 부모 말씀이 (심지어 안 들을 때도) 하느님의 말씀 같고, 부모의 목소리는 내면화되어서 사랑, 양심, 반성, 감시, 통제, 자책, 혹은 증오의 목소리가 되어요. 머리가 굵어지면서 부모, 실제의 부모,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가 된 내 안의 부모와 어떻게 대응하는가,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고 어떤 부분을 버릴 것인가, 그게 어찌보면 성장이라는 과제의 전부겠죠.
그래서 저는 제 성장의 과정에서 아빠를 제 적수, 혹은 맞수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적이나 원수라는 의미가 아니라 제가 맞서고 또 넘어설 상대, 그리고 저에게 교사와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주신... 괴롭지만 그 괴로움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는 그런 시련, 그러면서도 존경할 수 있는 상대로요.
이렇게 솔직히 얘기하니까 제 내면의 아빠는 역정을 내시네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키워놓았더니 이제 적수 같은 소리나 하고 완전히 맞먹으려고 하는구나. 뭐, 어찌보면 틀린 말씀은 아니에요. 제가 건방지고 못된 걸지도 모르죠. 그런데 아빠의 분노와 저 스스로 하는 자기비하는 어려서부터 너무나 지겹도록 반복한 과정이라 이제는 별 감흥도 없어요. 약발이 떨어졌달까요.
어려서부터 제게 아빠 앞에서 솔직하다는 것은 곧 고통이라는 대가가 따랐어요. 저 유치원 때였던가, 순간적으로 반찬이 아까워서 (전 차례대로, 반찬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먹는 계획이 나름 있었거든요) 아빠께 '아빠 그만 좀 드세요' 소리 했다가 엄마아빠게 스테레오로 야단맞은 생각 나세요? 제가 잘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어렸던 아이가 생각없이 한 소리가 그렇게나 아빠의 권위에 도전이 되고 배은망덕하고 못되고 건방지고 나쁘고 용서 못할 짓이었던가요? 왜 잘못했는지 설명을 해주셨으면 납득하고 죄송하다고 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실 일이었나요?
야단맞은 게 서러웠던 게 아니라 그 상황이 너무 감정적이고 격해서 어린 저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어요. 마치 세상 어디에도 날 사랑하는 사람은 없고 제게 안전한 곳은 없는 것만 같았어요. 제게는 그 집이, 그리고 엄마아빠가 세상이었는데 말이죠. 그날 저녁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저는 거의 숨을 못 쉴 정도로 울었었고, 울먹이면서 '엄마아빠 죄송해요...' 하다가 정신을 잃었던 것도 같아요.
제게 집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뭘 잘못하면 회복의 여지는 없다, 그대로 나는 '나쁜 아이'라는 나락에 빠지고 용서받지 못할 자식이 되어 하룻저녁 정도는 빌고 눈치보면서 지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었죠. 가족인 만큼 좋을 때는 참 좋았는데, 언제 무슨 말을 잘못해서 집안이 뒤집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 한 구석은 늘 가시방석이었어요. 아빠는 나중에 제게 너무 말을 외교관처럼 조심스럽게 한다고 뭐라고 하셨죠. 외교관이라, 참 좋은 비유에요. 말 잘못하면 전쟁이 난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때 이후에도 아빠께 혼나는 시간은 제게 지옥같았어요. 너는 못됐고 못났고 게으르고 참아줄 수가 없고 너 같은 애 때문에 아빠는 얼마나 많은 걸 바쳤고 너 같은 건 필요없고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뭐라고 한 마디 하라고 하시는데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될지 알았기에 말을 안 하면서 고문 같은 침묵의 시간만 늘리거나, 아빠가 듣고 싶어하시는 소리를 마지못해 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고 비웃음 당하거나, 아니면 못 참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가 다시 벽력이 떨어지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선택지만 남았죠.
그래서 그런 시간이면 뚫어져라 바닥을 보면서 저만의 세계로 도망쳤던 기억이 나요. 아빠께 의존하지 않고 내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성년이라는 그 미지의 낙원으로요. 그러면서도 아빠가 격한 순간에 하시는 (아마도 마음에도 없으셨을) 얘기는 차곡차곡 마음에 새기면서 아 그래, 나는 못났고 못됐구나. 난 사랑받을 자격 같은 건 없구나. 그래서 아빠가 나 때문에 불행하고 힘드시구나. 하면서 아빠의 감정을 꾸준히 자기혐오로 바꿔갔죠. 그때 노려보던 카펫 무늬는 지금도 눈앞에 선명해요. 그 무늬는 자존감이나 자기애 같은 건 닳아서 없어지던 시간의 시각적 표현이었죠.
어려서 제 꿈은 결혼하는 게 아니라 자립하는 거였어요. 어차피 나같은 애랑 결혼하고 싶을 남자가 있을 리가 없고, 있다고 해도 그런 남자는 틀림없이 정신이 이상하거나 바보일 테니까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굶어죽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게는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게 별로 없었어요. 어차피 결혼해봤자 남편은 나를 찍어누르려 들 테고, 아이는 나처럼 은혜도 모르는 못된 애일 테니까요. 어차피 잘못 태어났는데, 그냥 나 혼자 한 세상 살다가 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죽는 얘기 하니, 엄마아빠가 다니라고 하셔서 교회에 다녔던 어린시절에는 지옥에 대한 공포에 엄청나게 시달렸죠. 착한 사람이라고 천국 가는 건 아닌데 난 그나마도 못된 애였고, 또 예정받지 못하면 어차피 천국 못 간다고 하니까 제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저를) 지옥 못 보내 안달인 하나님이었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인류의 죄를 대속했어도 예정되어 있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져야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래서 늘 불안하고 무서웠어요. 성경시험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성경은 재미있었지만 그만큼 모순도 많이 보였고, 변덕스러운 폭군 하나님을 마음 속까지 신뢰할 수는 없었어요. 어쩌면 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은 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아빠가 저를 사랑하셨다고는 생각해요. 분명 아빠는 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셨고,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때로는 평가가 아니라 네가 너이기 때문에 믿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토론을 통해 제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고 논리를 다져주시기도 했고, 또 제가 누구보다 빛나는 미래를 꿈꾸시기도 하셨죠. 아빠 안에는 어떻게 보면 두 분의 아빠가 계셨던 것 같아요. 전쟁 후 농촌의 인습적 권위주의 속에서 자란 청년,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고 현대적 생각을 갖춘 엘리트. 그리고 그 둘을 관통하는 테마는 찢어지게 가난한 한국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신, 개발기 한국이라는 신화의 수많은 주인공중 한 분이었죠.
그런 아빠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서 그 두려움이 저에게도 전염된 것 같아요. 어려운 시절에 고학하고 자수성가하신 아빠가 그 사랑을 표현하시는 방법은 저를 어떤 전형에 꼭 맞추시는 거였죠.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날씬하고, 키크고, 서울대 졸업하고 등등. 그 엘리트적 전형에 맞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늘 깔려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아빠께서 생각하시는 성공의 조건을, 필요하면 매를 들고 소리를 지르고 모욕을 줘서라도 갖춰주려고 하신 아빠의 노력은 최상의 사랑이었을지 몰라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가 잘못일 지도 모르죠. 그 가능성은 인정해요.
언제부터 제 주체성을 포기하고 아빠의 판단을 무조건 따르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빠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기가 너무 겁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저 자신이 앞길을 개척해가는 노력을 하기가 귀찮았을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아빠께 맡기는 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보다는 편했어요. 그래서 엄마아빠가 원하시는 서울대만을 목표로 열심히 했고, 그게 떨어진 다음에는 다른 학교 법대에 갔고, 서울대에 못 갔으니까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을 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죠. 수업 시작하기도 전에 법서를 1~2번 읽으면서 열심히, 그저 열심히 해서 엘리트의 길에 오르는 게 곧 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학교 1학년 때였던가 2학년 때였던가, 학과공부 하면서 사시도 도전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사법고시는 졸업 후 해도 좋다더라, 하고 얘기를 꺼내보았었어요. 그때 아빠는 그런 건 그냥 하는 소리라고, 재학 중 합격이 최고라고 하셨죠. 저도 욕심이 난 건 사실이었고, 이때 저는 성공이나 엘리트가 되는 것이 인생의 최고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서울대에 떨어져서 땅에 떨어진 나의 가치를 (이때 제 생각이 이렇게 유치했답니다)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어요.
노는 것도, 봉사활동도 대학 1학년까지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내내 고시학원을 다녔죠. 그리고 대학교 2학년 여름에 병이 났어요.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도 받는 한편 씩씩하게 걸어서 근처 병원에 통원하며 피검사도 하고, 주는 약도 다 먹었어요. 그런데 왠지 낫지는 않고, 몸은 점점 지쳐가기만 했어요. 결국 휴학을 하면서 내 인생은 이걸로 끝이라는 엄청난 생각까지 했죠. 어느것 하나 되는 것이 없고 건강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실패자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엄마아빠가 안 계셨으면 자살이라도 했을지 몰라요.
몇 년 동안 아파서 맥없이 지내는 저를 위로하고 감싸주신 건 엄마아빠셨죠. 아빠는 그때 네가 그렇게 잘 이겨낸 의지력이 존경스럽다고 하셨지만, 전 사실 포기한 것에 가까웠어요. 아니, 어떻게 보면 병은 저에게 보호막이었어요. 성공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대신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때 저는 평생 처음으로 제가 쓴 소설을 인터넷에 공개했고 (중고등학교 때 끄적거리던 공책들은 수험 시절에 엄마가 버리셨지만), HTML과 CSS, PHP, MySQL 등도 배워서 웹사이트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병이라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저는 엘리트가 아니어도 되었어요. 엄마아빠는 그저 건강만 해달라고 하셨죠.
우여곡절 끝에 복학하고 졸업한 끝에 저는 이번에는 로스쿨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사법고시가 안 되었으니 이번에는 로스쿨 나와서 미국 변호사가 되는 것이 엘리트로서 저의 사명이었죠. 그런데 아파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 한 목표에 집착한 시간이 너무 길었을까, 저는 더 이상 대학 때 같은 확신이 없었어요. 법은 나름 재밌기는 했지만 뭔가 비본질적이었고, 그렇다고 따로 아는 것도 없었죠. 저는 수업과 시험에 그냥 끌려가면서 어떻게든 낙제는 면하는 생활을 했어요. 마치 제가 대학 때 그랬던 것처럼 따로 교재를 찾아보고 검색하면서 학과 공부에 열심인 학우들을 보면 신기하면서 동시에 자책감이 들었어요. 쟤들은 진짜 열정이 넘치고 부지런하구나. 난 뭘까. 저렇게 할 마음이 들지 않는 나는 왜 사는 걸까.
선택 과목을 들을 수 있게 된 2, 3학년 내내 거의 국제법 과목만 들은 것을 알고 나중에 아빠는 화를 내셨죠. 왜 이렇게 애가 비현실적이고 전략적이지를 못하냐고.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는걸요. 국제법 역시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가 갈구하고 있었던 탐구주제--평화와 인권의 문제--에 법으로서는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기는 했어요. 그래서 3학년 때에는 분쟁해결 관련 수업을 열심히 들었었고요.
물론 전략적이고 똑똑하려면 돈이 되는 분야, 이를테면 M&A나 증권 수업을 들었어야 했겠죠. 그랬어야 했다고 아빠는 나중에 저를 탓하셨어요. 어째서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 잘못일까요? 어째서 저는 이렇게나 멍청하고 비현실적인 아이일까요? 제가 원하는 것, 마음이 끌리는 것을 참고 미루어야만 잘 사는 것일까요? 그러면 좋아하는 것은 언제부터 할 수 있죠? 아니면 인생이란 원래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와는 상관도 없는 건가요? 마음이 이렇게 생겨먹은 저는 애당초 성공에 부적합한 인간인 걸까요?
왜 전 아빠 마음에 꼭 맞는 딸이 될 수 없었던 걸까요? 그렇게나 억누르려고 했는데, 왜 제게는 아빠와는 다른 욕구와 갈망이 있는 걸까요?
제게 왜 독립적인 인격과 마음 같은 게 있는 걸까요? 그런 거 없이 아빠 말씀만 듣고 살 수 있으면 편할 텐데.
졸업할 때에도 전 계속 갈등했어요. 정석은 법무법인에 들어가 몇 년 경력을 쌓고 귀국하는 것이었겠지만, 저는 정부나 NGO 일이 더 끌렸어요. 몇 군데 지원했지만 떨어졌죠. 어차피 저는 큰 법무법인에서 반길 만큼 성적이 좋지도 못했고, 또 네트워킹과 자료수집에 힘쓸 열정도 없었어요. 무엇보다 확신이 없었으니까요. 참 바보같죠?
다행히도 모교에서는 별로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던 저를 좋게 봐주어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자리를 주었어요. 그리고 페이퍼를 쓰지 못하면 계약은 연장되지 않을 수 있다고 처음부터 경고했었죠. 아빠는 뛸 듯이 기뻐하셨고, 저는 솔직히 직업 문제로 더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어요. 기필코 좋은 페이퍼를 많이 써서 교수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제 인생은 이제 다 승승장구할 것 같았어요. 서울대와 재학중 고시 합격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는 건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저는 나름 교수라는 직책을 달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처음부터 수업은 조금 등한시하더라도 페이퍼를 쓰는 것이 최고라고 강조했어요. 저도 정말 그러고 싶었고요. 하지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어요. 로스쿨 때 나름 열심히 썼던 텀페이퍼를 다른 교수님 종용으로 교내 학술지에 내보았는데, 별로 새로운 것이 없는 페이퍼라는 지적이 돌아오면서 또 다른 좌절이 시작되었어요. 역시 문헌 연구가 부족했던 걸까, 다른 텀페이퍼를 뒤적거려 보았지만 하나같이 새로운 건 없어보였어요. 제가 공부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이때부터 느끼기 시작했어요.
어떻게든 그 페이퍼를 보완해보려고 온갖 책을 찾고, 밥먹는 시간에도 책을 뒤지면서 머리를 쥐어짰어요. 그런데 그럴 수록 머릿속은 점점 백짓장이 되어가기만 했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질문을 할 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얘기를 꺼내다가 눈물만 나올 것 같았고, 제가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그저 교수가 되어서 아빠와 선생님들과 모두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리에 꽉 차 있었어요. 진지한 학문적 탐구 같은 건 들어갈 자리도 없을 정도로요.
남자친구와 사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어요. 먼저 나에게 고백해왔고 유학 중 엄마가 돌아가신 힘든 시간에 위안을 준 그에게 솔직히 얘기했죠. 내가 너를 정말 좋아하는지, 아니면 내가 일이 잘 안 풀리고 마음이 허해서 위안을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 착하고 따뜻한 사람은 그래도 괜찮다고 했어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나와 닮은 고민을 하고 있는 그와 서로 솔직하게 터놓고 고민을 나눈 시간이 그 시기의 유일한 위안이었어요. 고민이 없어지거나 페이퍼를 갑자기 쓰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더욱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거에요.
결국 계약 기간이 다 되었고,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저는 예상대로 재계약을 하지 못했어요. 차라리 후련했어요. 그 자리에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제게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2년 동안 고민하면서 차차 드러난 해답,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이 제게는 무엇보다 큰 성과였어요. 비록 연구는 잘 하지 못했지만 가르치는 것은 아주 재밌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한 과목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저는 혼쾌히 동의했죠. 커리어에 별 도움도 안 되는 그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는 게 정말로 비현실적이고도 바보같죠? 그런데요, 전 그게 마음이 편하고 제 자리 같아요. 연구도 하고 글도 쓸 거지만, 가르치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다른 말로 하면 제 인생입니다만) 거치면서 깨달은 거라면
일단 내가 살고 봐야겠다는 깨달음이었어요. 아빠를 포함한 타인의 기대, 세상이 좋다고 하는 목표를 최고선으로 삼아 달렸는데, 문제는 제가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아빠는 이런 저를 안타까워하시죠. 가장 빛나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면서 회의와 망설임 때문에 모든 걸 망쳐버린다고요. 어쩌면 저에게 있는 이런 가능성과 잠재력 때문에 아빠가 더욱 필사적이시고 감정적이실 지도 모르죠.
그런데 회의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게 없어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언젠가는 튀어나와요.마음이 기계처럼 '이걸 좋아해야지' 하면 좋아하고 '회의하지 말아야지' 하면 회의를 안 하고, 그렇게 뜻대로 움직이지가 않아요. 제 생각을 억누르고 아빠랑 똑같이 생각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한계가 오더라고요. 두려움과 불안에 마음이 말라죽을 것 같아서 못 참겠어요. 제가 2년 동안 그랬듯 그렇게 불행하면 교수를 하든, 아무리 빛나는 자리에 있든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제가 실망스럽고 한심하시겠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아빠 딸은 이렇게나 한심하고 게으른 걸요.
아빠도 마음이 느긋하실 때면 인생이 절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꼭 교수니 성공이니 하는 데 집착할 거 없다고 하시죠. 그러면서도 또 마음이 급하고 지치실 때면 그거 다 페이퍼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네가 안하는 건 다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뭐라고 하세요. 둘다 맞는 말씀인데, 솔직히 이제는 지쳐요. 기분에 따라 변하는 아빠 원칙에 따라, 어릴 때부터 그랬듯 아빠한테 눈치보면서 제 기준이 없이 살았다가는 제가 죽어요.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쪽이 가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아빠를 제 인생에 대한 책임에서 놓아드릴래요. 이제는 아빠 판단이 아니라 제 판단대로 하고, 책임도 제가 질게요. 아빠가 뭐라고 하시든 그 말씀에 죽고 사는 게 아니라 참고할 것만 참고할게요. 실수하면 실수하고, 잘못하면 잘못할 거에요. 그런 시행착오 없이 좋은 판단력을 기를 수도 없고, 실패도 제 선택의 일부니까요. 아빠는 아빠 말씀 들어서 시행착오를 줄이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판단을 전부 저 대신 해주고 계셨잖아요. 그렇게 맡긴 덕분에 편하게 살아온 것도 사실이지만, 더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는 '제' 인생은 영영 시작하지 않아요. 행복이든 불행이든 제가 선택할게요. 그만큼 아빠가 키워주셨으니까요.
제 책임을 아빠께 버려두어서 정말 죄송해요. 무서워서, 불편해서, 귀찮아서, 아빠가 책임지실 수 없는 제 인생에 대한 판단과 선택을 아빠께 맡긴 건 저의 직무유기였어요. 좀 더 일찍 반항하고, 좀 더 많이 싸우고, 좀 더 빨리 실망시켜드렸어야 하는데 그 과정을 미루고 미룬 제 무책임을 깊이 반성하고 있어요. 제 삶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는 것이 저의 적수인 아빠에 대한 예의였는데, 그러지 않고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네요. 너무 무거운 짐을 지시고 그동안 힘드셨죠? 이제 내려놓으셔도 돼요. 싸워서라도 아빠께 그 짐, 제 인생에 대한 책임이라는 무게를 빼앗을 거니까요.
착한 딸이 되고 기대대로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저 자신답게 사는 것이 그 이상의 소명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요. 아빠가 생각하신 길보다는 조금 더 어렵고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제게는 유일한 길이기도 해요. 뭐라고 하시든 속마음은 저를 믿고 응원하신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가끔 불안감에 겨워 싫은 소리 하셔도, 이전에야 자기혐오와 자기불신에 못이겨 떨었겠지만 앞으로는 그냥 웃고 말래요. 아빠 말씀에 너무 파르르 떨지 않는 것도, 때로 적당히 귀먹는 것도 효도일 테니까요. 결국 제가 행복한 것만한 효도가 어딨겠어요?
저는 제가 착한 딸이 되어 아빠 희생에 보답하고 아빠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돌아보니 그건 오만이더라고요. 아빠 행복은 아빠가 찾으셔야 하고, 제 행복은 제가 찾아야 해요.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인 얘기지만 그것밖에 길이 없는 것 같아요. 부녀로서 우리의 교감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서로 기대고 아껴주는 그 접점에 있는 것이지, 삶을 대신 살아주고 행복을 책임져주려고 드는 그 뭉그러진 혼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늦게서야 그걸 깨닫고 서른이 넘어 시작하는 저의 사춘기 반항을 지켜봐 주세요. 아빠도, 세상 누구도 아닌 온전히 저다운 행복을 향한 서투른 몸부림을.
On Children
자녀에 대하여
Kahlil Gibran, The Prophet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中
Your children are not your children.
They are the sons and daughters of Life's longing for itself.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
너희 자녀는 너희 자녀가 아니니,
그들은 생(生)이 자신을 갈구하는 마음의 아들과 딸이니라.
그들은 너희를 통해 나되 너희에게 나지 않으며,
너희와 함께 하되 너희게 속하지 않을지라.
You may give them your love but not your thoughts,
For they have their own thoughts.
You may house their bodies but not their souls,
For their souls dwell in the house of tomorrow,
which you cannot visit, not even in your dreams.
You may strive to be like them,
but seek not to make them like you.
For life goes not backward nor tarries with yesterday.
자녀에게 사랑을 주되 생각을 줄 수는 없나니,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있음이라.
자녀의 몸에 보금자리를 주되 영혼은 그리할 수 없나니,
그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
너희는 꿈속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그곳에 거하는도다.
그들과 같아지려 노력하되,
그들을 너희와 같이 만들려 하지 말라.
생은 거꾸로 흐르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 않나니.
You are the bows from which your children
as living arrows are sent forth.
The archer sees the mark upon the path of the infinite,
and He bends you with His might
that His arrows may go swift and far.
Let your bending in the archer's hand be for gladness;
For even as He loves the arrow that flies,
so He loves also the bow that is stable.
너희는 살아있는 화살인 자녀를
쏘아보내는 활이로다.
궁수는 무한의 길목에 있는 표적을 보시고
그 권능으로 너희를 크게 휘어
그분의 화살을 빠르게, 멀리 보내시니라.
궁수의 손에 휘어짐을 기쁨으로 여기라.
그분께서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시듯
흔들림 없는 활을 사랑하시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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