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Avatar)를 3D, 아니 의자까지 흔들어 주시고 얼굴에 물뿌려주는 4D로 봤다. 어차피 영화관 외에는 절대 볼 생각이 없으니 아침부터 속이 안 좋은 날이기는 했지만 부득불 가서 봤다. 아마 요즘 아바타 보기 어려운 게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라 그런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후회하지는 않는다. 영상은 정말 수준급이었고, 실사와 애니메이션 입힌 실사가 기존의 컴퓨터 그래픽이나 외계인 의상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외계인의 생김새는 워낙 실감나고 움직임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아바타의 기술적, 시각적 완성도에 대한 찬사는 정말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스포일러)
소재나 상황 역시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자원과 수익을 위해 원주민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는 제국주의와 이윤 우선주의는 실제 역사에서도 질리도록 본 내용 아닌가. 외계인 나'비의 문화나 복장, 행동양식은 우리 세계의 미국 원주민을 방불케 하는 점이 많았고, 영화 중 대령이 원주민을 가리켜 쓴 hostile이라는 표현은 서부개척이 한창일 때 미대륙 원주민을 미군에서 흔히 칭하는 말이었다. 또 홈트리를 불태우는 장면에서는 고향에서 쫓겨나는미국 인디언 외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이스라엘의 행태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듣던 대로 이 흥미로운 소재와 최고급의 영상을 끌어가는 대본은 영 신통치가 못했다. 우선 가장 약한 부분은 인물의 변화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열심히 나'비의 사냥 기술이나 정신세계를 배우는 장면은 나오지만, 정작 그가 나'비의 편을 들게 된 계기랄까, 전환점은 없어서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쟤가 왜 저러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나'비 편으로 전향한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스 정도를 빼고는 인물이 그렇게 할 만한 개연성은 별로 안 보였다. 결국 플롯의 필요에 따라 실을 당기면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생동감 없는 등장인물은 영화에 대한 감정적 몰입을 어렵게 했다.
그나마 설리가 나'비를 선택할 만한 가장 개연성 있는 이유는 불행히도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의 도덕적, 정신적 변화를 모르겠다 보니 그나마 공감이 가는 건 첫 번째, 아바타와 접속한 상태에서는 원래 몸과는 달리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두 번째, 이미 약혼자가 있는 네이티리를 갖고 싶었다는 것. 어느 쪽이든 이해는 가지만 설리를 썩 좋게 생각하기는 어려운 동기이다.
대본이 또 약한 부분이라면 스토리의 개연성이다. 설리가 순전히 에이와 여신의 선택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나'비 부족에서 받아주었다는 것도 꽤나 편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지만, 이후 인간들과 맞서싸우는 진행을 보면 이야기와 결말 자체가 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의존하는 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업 군인 출신이라는 설정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는 전술적 판단으로 설리가 그 많은 전사를 죽여먹자, 에이와가 이 무능한 놈을 선택한 게 뒤늦게 미안했는지 원군을 보내줘서 살았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 아닌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에이와가 한 일인데 저 많은 인물이 뭐하러 필요했는지, 이야기 자체에 회의를 느끼며 끝난 결말이었다.
에이와, 어째서? (..)
인물과 이야기의 개연성과 완성도 부족이라는 가장 치명적인 결함 외에도 문제는 너무나 많았다. 일단 위에서도 언급했듯 나'비의 문화나 상황 등은 아주 의도적으로 미국 원주민에게서 따왔다. 그래서 도저히 깊이나 뉘앙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유치한 신비주의 일색의 나'비 문명은 인종차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주에서의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지만 늑대와 함께 춤에서조차 원주민 문화를 저렇게까지 평면적으로 폄하하지는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에 고도로 적응한 세련된 문명의 모습이 엿보이는 나'비가 대지와 여신밖에 모르는 순진한 컬트집단으로 나온 것은 꽤 실망스러웠다.
인종차별 하니, 왜 위기에 처한 원주민은 꼭 백인의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발상도 참 유치찬란하고 단순무식해서 짜증이 났다. 또 너무나 포카혼타스를 방불케 하는 상대역 네이티리의 전형성이라든지, 그 똑똑하고 유능한 여자가 점점 주인공 들러리로 전락한 고색창연한 남성중심 판타지, 다른 남자하고 정혼이 되어 있다가 외부인하고 연을 맺은 그녀의 행동이 잠깐 문제가 됐다가 '드래곤 라이더니까 괜찮아' 하고 모든 것이 무마된 어찌보면 적나라한 성공지상주의 등 스토리는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었다.
아바타의 영상이나 기술은 분명 훌륭하지만, 영화의 기술은 좋은 이야기를 전할 때 가장 빛난다. 기술이란 도구이며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바타는 기술적으로 높이 쳐줄 수 있지만 이야기로서의, 따라서 영화로서의 실패는 그 훌륭한 영상 때문에 오히려 더 두드러졌다.
아바타의 가장 긍정적인 영향은 영상기술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바타의 상업적 성공은 기술개발과 투자심리를 촉진할 것이며, 그 결과 더 많은 3D 영화가 쏟아져나올 것이다. 많이 나오다 보면 그 중에는 명작도 있을 것이다. 아바타가 보여준 기술이 앞으로는 완성도 있는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기술에 현혹되어 진짜 재밌는 영화가 무엇인지 잊지 않는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아바타는 정말 수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에 압도당해 멍하게 있다가 나와서 "잘봤네. 너도 봐라." 하는 목적으로서는 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편이라는 (낮은 문맹률이라던가 기타 등등) 우리나라에서도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한달에 책 한권을 읽을까 말까 합니다. 대중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를 매체로부터 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압도적인 영상과 음향으로 멍하게 앉아 있다가 나오게 하느냐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와버렸습니다. 당장에 그 쪽이 돈이 되니까요.
(지독한) 편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 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등 - 가 21세기에도 나왔는지, 저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오직 문학으로 전달될 때 빛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이래서 저는 활자중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회사가 책 읽을 시간을 빼앗아 갑니다. 죽겠습니...)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영화가 요즘에 없나? 월-E도 꽤 수작이었고, 밀양도 좋았고, 다크 나이트라든지 드림걸즈라든지 이번에 아카데미 작품상 탄 허트 로커라든지.. 이야기가 좋은 영화는 찾아보면 많은데, 흥행도 괜찮은 게 많고. 뭐, 드라마는 또 말할 것도 없고. 배틀스타 갤럭티카, 더 와이어, 하우스, 로스트 등등. 소설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영화로 전달하는 게 더 효과적인 얘기가 있는 법이고, 영상 기술은 영화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저 영상과 음향에 멍해져 있다 나온 1인으로서
뒤늦게 로키님의 비평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공감이 가는 점이 많네요.
하긴 넷에서도 주인공 제이크의 선택에 대해 군인크리VS예쁜 애인잡아 잘먹고 잘살기중에 어느쪽을 선택할지는 자명하지 않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죠.
개인적으론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전(?)상사인 그 대령이 마지막에 꼭 액션게임의 보스같은 전형적인 분위기를 너무 티나게 풍겨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바타의 성공은 결국 영화 트랜스 포머처럼
역시 영화의 기록적인 성공이란 스토리가 아닌 영상기술에 달려있는것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되는군요.
씁쓸하죠, 스토리가 아닌 돈과 기술로 승부하는 게 남는 장사라면. 그래도 뭐 좋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공급과 수요가 모두 계속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뱀프군처럼 포기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대령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전형적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더 그랬죠..ㅋㅋ 스토리 자체가 전형적인 요소가 참 많았어요. 그 전형성을 창의성으로 신선하게 녹여내지 못한 게 아쉽죠 뭐.
이창동 감독, 전도연 주연의 그 유명한 2007년작 영화 밀양 이야기를 이제서야 하면 유행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은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는 이 영화를 바로 최근에야 본 것을. 그리고 유행에 형편없이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유행에 뒤처진 사람으로서 내가 뒤늦게 본 밀양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다.
꽤 된 영화인지라 감출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혹시 안 봤다면 미리니름 (스포일러) 무지 많으니 이 글은 피할 것을 권한다.
영화 밀양은 고통이라는 쉽지도 편하지도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신애의 남편은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죽었고, 아들 준도 그 아이가 신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둘의 일상이 작지만 얼마나 행복했는지 보여줄 만큼만 시간을 차지한 후 일찌감치 죽으며 자리를 비켜준다. 누가 죽였는지 궁금해할 추적과 수사의 시간도 거의 없고, 사건에 대한 긴장감이나 반전도 없다. 그저 슬픔이 남을 뿐.
시간과 극적 공간을 채울 만한 나머지를 깔끔하게 걷어낸 후 나머지 영화는 온전히 신애의 몫이다. 그녀가 고통에 멍해있고, 몸부림치고, 작은 빛을 찾아 필사적으로 파고들고, 다시 절망하고, 절규하는 모습으로 나머지 영화를 채워가면서 견딜 수 없는 상실을 겪은 한 인간의 고통과 회복이라는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래서 오직 한 사람의 고통을 쫓는 이 영화는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없으면 성립하지조차 않는다. 전율이 일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선이 굵고 과감한 그 연기가 없었으면 밀양은 최악으로 시시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동급의 상대역도, 로맨스나 스릴러, 법정 드라마 등다른 장르적 재미도 일체 없는 영화를 채워가는 전도연의 몫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버겁지만, 그녀는 그 도전 앞에서 갈고 다음은 보석 같은 연기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장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칸느상은 부족하다 싶을 정도이다.
전도연의 그 연기력 때문에 관객은 (영화 시간이 남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신애가 갑자기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그것으로 그녀의 고통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다는 신애의 웃음은 진실하지 않고 불안하다. 자기 안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가 없기에 고통에서 신에게로 도피하는 그녀의 속내를 어색한 웃음은 그대로 보여준다.
신애의 웃음이 어색한 만큼이나 같은 교인들의 태도도 지나치게 즐겁고 일상적이다. 마치 신애가 아들이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기르던 개가 차에 치이기라도 한 듯이, 신을 믿으면 그 모든 아픔에는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처럼 신애를 포함해 그들은 그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않고, 구원받았으니 이제 고통 끝 행복 시작이라고 필사적으로 말한다.
그러한 고통의 부정과 외면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종교만으로 신애가 고통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 종교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엄청난 현실에 마주하면 도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인간 본성의 정직한 자화상일 뿐이지, 신애를 도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그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신애와 동료 교인들이 그녀가 겪은 상실과 분노의 검은 구덩이를 화사한 종교적 장식으로 덮으려고 애쓴 것이 공감이 가는 이유가 또 있다. 신애도 알고 있었고, 다른 교인들도 느끼고는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신애는 미친다는 것을. 신애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고통의 심연에 도사린 광기에서 그녀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종교극을 연출했다.
그 외관에 금이 간 것은 신애가 아들을 죽인 범인을 반대를 무릅쓰고 용서하러 간 면회장면부터이다. 신애의 하나님에게 용서받아 너무나 마음이 편하다며 평온히 웃는 그를 보며 이건 뭔가 아니라고 느낀 것은 나와 신애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용서를 빌면 그만이라는 값싼 구원의 모순에 직시하면서 종교극의 무대는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사실 아무리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살인자가 마음 편하게 잘먹고 잘 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진짜 회개는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회개했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마음이 편해서는 안 된다. 매일같이 괴롭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속죄해야지, 죄가 아무것도 아닌양 길가에 내던지고 이제 난 평화를 찾았다며 유들유들한 얼굴로 미소짓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예수가 실제로 한 말씀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9~14절)
결국 유괴범의 신앙은 신애의 신앙을 일그러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신애가 고통에 직면하는 대신 종교로 가렸듯, 유괴범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에 마주하는 대응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거대한 기만 앞에 종교극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아픔의 검은 심연에서는 차가운 광기의 바람이 불어온다.
고통을 한 꺼풀 가린 종교의 장막을 걷으면서 영화는 그나마 종교적 구원 영화로 편하게 빠질 수 있는 마지막 장르적 출구조차 외면하고 주제의식 탐색의 극단을 향해 질주한다. 추적, 복수, 사랑, 신앙 그 어느 하나의 명쾌한 답도 없이 채 영화는, 그리고 신애는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여정을 걷는다.
어떻게든 피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고통의 밑바닥은 역시나 유쾌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곳은 어둡고, 복잡하고, 더럽고, 추하다. 그러면서도 부흥회에서 '거짓말이야'를 트는 장면에서처럼 통렬한 웃음을 잊지 않는 감각에 이창동 감독과 극작가에게 경이를 표하는 바이다. 미로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길 위에서, 견딜 수 없는 신애의 아픔과 분노에는 어떤 쉬운 해답도 없다.
신애는 목숨은 건지고 치료를 받지만, 멋진 의사선생의 말 한 마디에 울음을 터뜨리며 깨달음을 얻는 의학드라마조차 피한 영화 속에서 그녀의 회복은 여전히 길고 어렵고, 결국 불완전할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상실의 아픔은 끝끝내 안고 갈 짐이라는 것을, 구원은 어느 순간 쏟아지는 광휘가 아닌, 아무리 아파도 묵묵히 걷는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신애에게 전도했던 약사가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한 그 햇살은 어디에나 숨어있다. 우리가 딛고 사는 땅, 숙명처럼 상실을 겪은 여자가 잘라낸 머리칼이 흩어지는 그 흙 위에도 따사로운, 은혜로운 햇살은 깃든다. 생각만 해도 벅찬 회복의 여정을 묵묵히 걷는 신애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 속에, 신애 말대로 인테리어를 바꿨더니 손님이 늘었다고 좋아하는 이웃의 웃음 속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아도 그녀를 쭐레쭐레 쫓아다니는 노총각의 헌신 속에, 인간이라는 연약하고 때로 추악한 존재 속에는 작은 햇살이 숨어있다. 버거운 슬픔 앞에 그 온기는 불완전한 해답이지만, 때로는 유일한 해답이기도 하다. 고통의 끝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작고 보잘것없는 희망밖에 없기에.
언론법과 집시법에 대한 논의를 보면서 나는 1939년 미국 영화 '워싱턴에 간 스미스씨 (Mr. Smith Goes to Washington)'를 떠올린다. 정치와 아무 상관없이 살아오던 젊은이 제퍼슨 스미스 (제임스 스튜어트 분)가 얼떨결에 상원의원이 되어 워싱턴의 위선과 부패에 맞서는 내용인 이 영화는 언론 독과점과 시위의 자유 문제 역시 극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특히 시의성이 있다. (스포일러가 싫은 분은 다음 문단은 건너뛰길)
영화 속에서 부패의 누명을 쓰고 상원에서 제명당할 위기에 처한 스미스는 동료 의원의 부패를 폭로하고 오명을 벗으려고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영화의 악역이자 부패의 배후인 짐 테일러는 (에드워드 아놀드 분) 스미스의 출신 주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을 장악한 재벌이다. 테일러는 자신이 소유한 언론사에 지시해서 스미스를 부패한 의원으로 힐난하는 보도를 대대적으로 시킨다. 스미스에 대한 진실을 알리려고 전단지를 찍고 거리에 나선 소년들의 시위는 폭력적으로 진압당한다. 그 결과 스미스가 대표하는 주민들은 스미스가 잘못이라고 굳게 믿어버리고, 그를 비난하는 엄청난 양의 우편물이 의회에 도착한다. 이미 신체와 정신이 한계에 달한 스미스는 그 편지들을 보고 무너지듯 쓰러진다.
언론 독과점과 집회와 시위의 자유 제약이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이유를 '워싱턴에 간 스미스씨'는 아주 단순하고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유가 형식적 자유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중학교 역사 교과서만 봐도 안다.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국가에서 어느 정도 바로잡지 않으면 권력과 재력을 독점한 일부는 가히 전제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며, 나머지는 죽을 자유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 민주국가라면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할 권리, 미성년자 노동에 대한 규제, 노동시간과 조건 제한 등을 법으로 정하고 있게 마련이다. (노조 결성권은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으로도 규정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는 형식적 자유가 평범한 시민에게 얼마나 억압적이고 비참한지는 역사가 알려주고 있으니까.
언론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얼마든지 언론사를 차릴 수 있다는 형식적 자유는 현실적인 재력의 불균형 때문에 언론 독과점을 사실상 조장한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근로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형식적 자유가 노예제나 다름없는 상황을 조장했듯이. 일부 돈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언론을 모두 장악하면 '워싱턴에 간 스미스씨'에서처럼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란 극히 일부의 전유물이 된다. 민주주의의 근본인 다양한 시점과 의견이 자유롭게 경합하는 시장을 말살하는 그런 형식적 자유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정이다.
대통령이라고 이런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아니까 그런 입법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 그와 그들이 원하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닌, 힘있는 이들 몇몇만을 위한 사회이니까. 불편한 저항과 다양하게 불거져 나오는 반대의견을 비애국적이라거나 친북이라거나 좌파라거나 하는 단순한 이름으로 일축할 수 있는 깔끔하고 일사분란한 사회가 그들의 이상향이니까. 국가과 재벌이 손잡고 점점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군국주의로의 회귀야말로 그들의 영원한 꿈이다. 반대를 두려워하고 다양성이 싫은, 상상력이 메마르고 지적으로 빈곤한 불쌍한 자들이 구하는 위안이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두려우면서도 우습다.
그래서 지금 내 블로그에는 표현의 자유가 눈이 내린다. 이 긴 밤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미약한 등불을 들어보인다. 남들도 볼 수 있게, 같은 불빛을 보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게, 그리고 어쩌면 참 멀어만 보이는 그 여명을 불러들일 수 있도록. 터벅터벅 서울로 걸어가는 스미스씨의 지치고 외로운 뒷모습 위로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 조용히 눈이 되어 내린다.
주말에는 픽사르와 디즈니의 매우 성공적인 합작의 또 다른 결과물인 월리 (Wall-E)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했던 대로 상당히 괜찮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기계에서 인간보다 인간다운 감정을 끌어낸 디자인부터 시작해 성장과 용기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다정다감하게 다루어낸 대본까지 '월리'는 상당히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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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와닿았던 것은 모든 것이 보장된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지구에 돌아가겠다는 액시엄 호 함장의 결정, 그리고 항법 컴퓨터 '오토'의 대립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적 성장의 고통이기도 하니까.
오토 (Auto: 자동)라는 이름에도 드러나지만 오토는, 그리고 액시엄 호는 인간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편의를 제공한다. 로봇들이 모든 시중을 들어주고, 노력할 것도, 극복할 과제도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유년기이다. 모든 책임은 돌봐주는 사람 (부모이든 로봇이든)이 지고, 판단을 내릴 권리도, 결과에 대한 책임도 없이 그저 존재하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액시엄의 상태가 유년기보다 한층 더 심한 점은 그런 완벽한 안락이 영구적이라는 데에 있다. 아이는 누구든 자라서 자기 삶에 책임질 개체가 될 것을 기대받고, 그때를 위해 교육과 훈육을 받는다. 반면 액시엄 호 승객들은 언제까지나 의존적인 상태에 있을 것을 권장을 넘어 강요받는다. 그들의 삶에는 교육도, 성장도 없다. 그저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봉쇄당한 영원한 유년뿐.
그렇게 완벽하게 안전하고 고분고분했어야 할 액시엄호에 변화가 찾아온다. 하나는 이브와 이브가 품은 작은 풀포기,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에 지정된 과업도 버리고 그 이브를 쫓아온 월리. 전자가 지구로 갈 가능성이라는, 변화의 물리적 가능성이라면 후자는 지구로 갈 용기, 즉 영적 자극이다.
수백 년 간의 고독 속에서 쓰레기더미에서 찾은 음악과 영상을 통해 춤과 낭만 같은 비실용적인 것을 학습한 월리는 사람을 만나면 손을 내밀며 이름을 말한다. 서로 얼굴을 보는 대신 화면만 들여다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아마도 옛날 테이프에서 본 모습 그대로.
사람들이 중독되어버린 화면을 꺼버리고 악수를 하고 자기소개를 하는 월리는 액시엄 호에, 그 승객들 속에 잠들었던 것을 서서히 깨운다. 이 로봇은 700년 전에 산 사람들의 인간다움을, 얼굴을 마주보고 악수를 하고, 춤을 추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전해준다.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이 로봇은 먼 과거로부터의 전령이다. 인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 다시 될 수 있는지 일깨우는.
이브가 품어온 생명의 증거를 보고 함장은 지구의 자료를 찾으며 푸른 하늘과 황금들판, 생동감 넘치는 춤을 꿈꾼다. 그러나 하늘은 잿빛이고 들판은 불모지가 되었으며, 춤을 추려면 먼저 몸을 반중력 의자에서 일으켜야 한다. 영상자료와는 너무 다른 지구의 황폐한 모습에, 넘어서야 할 어려움의 거대함에 함장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성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고통에.
자유와 열정의 아름다움은 공짜가 아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뿐만 아니라, 고통과 두려움을 넘어서지 않고는 자유로울 수도, 열정적일 수도 없다. 수백 년의 고독이 없었으면 월리가 이브를 따라 우주로 나갈 수 있었을까? 음악을 듣고 테이프를 보며 혼자 꿈만 꾸던 그 수많은 시간이 없었으면 월리가 그렇게 춤을 출 수 있었겠으며, 이브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브에게 그 안타까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
영화 거의 끝머리에서 잠시 기억을 잃은 월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열정은, 그리고 인간다움은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었다. 문명의 잔재 속에서 매일을 혼자 보내면서 느낀 고독의 깊이는 이 로봇에게 영혼의 깊이가 되었다. 영혼을 깊게 파내는 고통을 감내할 용기가 있는지, 안락과 안전을 떠나 거대한 미지 속으로 내딛어서 자신 이상의 자신이 될 수 있겠는지 월리는 천진한 눈빛으로 무언의 도전을 던진다.
함장에게 그 시작은 아주 작았다. 보잘것없는 풀 한 포기의 생명을 책임지고, 어떻게 이 작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서 해결하는 그 작은 한 걸음은 지구를 마찬가지로 책임져야겠다는 결단이 되었다. 이곳은 안전하며, 무사히 생존할 수 있다는 오토 앞에서도 함장의 의지는 확고하다.
난 생존하고 싶은 게 아냐. 살고 싶다고!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이 대사를 '월리' 최고의 명대사이자 영화 한 문장 요약으로 추대하는 바이다. 월리는, 그리고 그를 보며 함장과 이브도 깨달았던 것이다. 그저 먹고 숨쉬고, 혹은 무사히 작동하며 프로그램대로 존재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열정과 신념을 위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통을 감내할 의지 없이는, 가장 깊은 영혼의 부름을 따를 용기 없이는 진정 살아간다고 할 수 없음을.
그래서 그들은 생존을 넘어서는 삶을 선택한다. 함장은 오토와 싸워 이기고, 이브는 월리를 살리려고 분전한다. 함장은 자기 발로 스스로 일어서 물리적 자동화뿐만 아니라 영적 자동화를 강요했던 오토를 기능 해제하고 스스로 조종키를 잡는다. 그럼으로써 그는 명목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함장이 되어, 스스로 생각해 책임지고 극복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지구로의, 그리고 고통을 감내할 용기를 통해 한층 성장한 자신들을 향한 여정을.
고통도 부담도 없는 '생존'이 아닌 선택과 고난과 극복이 있는 '삶',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월리'의 얘기다. 자동화된 조종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대신 스스로 키를 잡고 자기 배의 선장이 되어, 때로 막막한 바다를 스스로 고른 항로를 따라 헤쳐가는 우리들의 이야기. 그것이 영원한 유년기에서 벗어나 어른이 된다는 것이며, 인간이라는 의미일 테니까.
화제작(?) 다크 나이트를 봤다. 기법상 굉장히 세련되게 잘 찍은 영화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듯 조커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이래서야 히쓰 레져가 사후 남우조연상 수상 못했다가는 아카데미 욕 바가지로 먹을 듯. 아니, 그 영화에서의 비중을 보면 주연일지도 모른다. (...)
다크 나이트는 근본적으로는 복잡한 윤리극이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도덕성을 두고 고민시키고, 딱히 떨어지는 답 없이 많은 해석의 여지와 그늘을 남긴다. 하지만 결국 수퍼히어로/헐리우드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해서, 특히 끝에 가서 너무 친절하게 포장해서 먹여준 주제의식과 배트맨 우러르기는 좀 별로였다.
이런저런 생각들 (스포일러)
1. 고담 최악: 영화 내내 고담 경찰은 세계적 수준의 무능과 부패를 자랑했다. 조커한테 매번 당하는데 나중엔 짜증났다. 저런 경찰을 (게다가 줄거리상 그 중 상당수는 범죄조직 끄나풀) 세금으로 먹여살리느니 이사간다. ㅡㅡ;; 범죄와 테러가 저렇게 많은 곳에 왜 살어. 설마 고담 벗어나면 오히려 더 위험한 무시무시한 디스토피아인 걸까.
2. 사내연애의 허와 실: 하비 덴트와 레이첼 도스의 관계는 영화 보면서 좀 고개를 갸웃한 부분. 덴트 쪽이 선거직 고담 검사장이니까 레이첼은 그의 부하 검사라는 얘기인데, 저런 상황에서의 연애란 상당히 애매모호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수근거리기도 딱 좋은 구도고. 덴트가 완전 새내기 검사장이고 전부터 사귀던 사이여서 아직 문제가 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영화 첫 장면에서처럼 사건도 같이 맡는 직속 상관과의 연애는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한다.
3. 자랑스러운 고담시 경찰력: 첫 재판 장면 하니, 왜 그놈의 총은 못 찾았는지 모르겠다. 금속제가 아니라고 뭐라고 뭐라고 설명하기는 했는데, 아무리 금속제가 아니라고 해도 크기는 꽤 큰데 제대로 수색만 했어도 그냥 나왔겠다. 고담 경찰은 무능하고 부패한 걸로 부족해서 게으르기까지 한 건가, 아니면 손 감각이 둔한 걸까.
4. 돈은 또 다른 수퍼파워다: 아이언 맨 주인공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수퍼히어로는 초인이 아닌, 돈과 과학기술로 처바른 전투원이다. 아무리 기술이 현존해도 비용 대 효용 대비 때문에 일반 경찰이나 군대에서는 못 쓰는, 내지는 유출을 우려해서 수퍼히어로 혼자서만 알고 쓰는 기술력의 영웅.
어찌보면 그래서 이들은 초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언 맨도 배트맨도 돈을 물려받은 대갑부이니, 그게 유전적으로 초능력을 타고나는 것과 크게 다르겠는가. 아이언 맨 쪽은 천재적인 두뇌까지 있었으니 더더욱 그들은 초인이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초능력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든지 벌수 있(다고 하)는 돈으로 무장했다는 점에서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있다. 배트맨이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인가가 상처를 꿰메는 모습인 점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꽤 인간적인 수퍼히어로라는 느낌? 그게 영화 자체의 테마와 들어맞기도 하고.
5. 그들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이유: 배 두 척을 두고 한 시간 제한이 있는 죄수 딜레마 게임을 ('쟤를 배신하고 네가 살래? 안하면 쟤가 먼저 배신할 거야.') 장면에서, 정말로 그 스위치가 상대편 배 기폭 장치인지 누가 아는가. 조커가 그렇게 얘기해서? 승한군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하지만, 조커는 의외로 거짓말은 안하니까 일단 자기 배가 아닌 상대편 배 기폭 장치가 맞았다고 치자.
하지만 진실이 어땠든지 간에 사실 도시를 박살내는 테러리스트 말을 시민들이 굳이 믿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 캐감동(?)의 스위치 안 누르는 장면의 진상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스위치에 대해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단 조커는 미친놈이고 사람 갖고 노는 것을 즐긴다. 따라서 상대편 배 기폭 스위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쪽 배 기폭 장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양쪽 배 모두 선택은 '살인을 저지르고 살아남거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죽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조커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면 그게 선택이겠지만, 조커의 말이 거짓말이고 스위치가 이쪽 배의 기폭 스위치라면 '자살하거나 살아남는 것'이 된다.
죄수 딜레마 게임의 기본 전제는 동료를 배신하면 정말로 이익이 있다는, 즉 제시하고 있는 게임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딜레마에 몰아넣은 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미치광이 테러리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놈이라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고담 경찰보다는 신뢰할 수 있을지도), 나라면 그 스위치를 잡은 순간 대충 이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이다.
'우리가 누르지 않으면 저쪽에서 눌러버릴 거야! 그래, 누르자! 하지만... 정말 조커 말을 믿을 수 있어? 만약에 저 미치광이가 거짓말, 아니 '농담'을 하고 있다면 누르는 순간 자살이잖아. (식은땀) 그리고 거짓이라면... 아, 그러면 저쪽 배는 누르는 순간 그냥 혼자 꼬라박고 끝나는 거고, 나한테는 아무 위험도 없잖아. 조커의 진실성에 정말 목숨까지 걸 수 있어? 에라 모르겠다, 정말 100% 확실하다면 누르겠지만 조커를 믿을 수 없는 한은 자살의 위험은 무릅쓰지 않을래.'
다크 나이트를 윤리극이라고 하는 게,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관점보다는 추상적 관념이 전제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 즉, 여기서는 죄수의 딜레마가 진실이라고 믿어야 감동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조커가 사실을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에 말했듯 거짓말은 안하니까.
하지만 윤리극의 관점에서 벗어나 죄수의 딜레마를 조금만 삐딱하게 보면, 그리고 현실적인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사실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이유는 대단한 양심 같은 것일 수가 없다. 아무 확인 없이 미친 테러리스트 말만 믿고 자살과 살인 중에 선택해? 어림도 없지.
뭐 까짓거 우리의 훌륭한 덴트씨라면...
레이첼의 죽음 전: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안 누르고, 뒷면이 나오면 누른다.' (...) 레이첼의 죽음 후: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안 누르고, 뒷면이 나오면 누른다.' ㅡ0ㅡ
6. 수퍼히어로 여자친구의 조건: 수퍼히어로물의 전형을 또 비튼 건 원작에는 없는 레이첼 쪽 줄거리였다고 본다. 수퍼히어로에 목맨 여자가 아니라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가슴아파하면서도 결국은 마지막 편지에서 드러났듯 자기 마음을 당당하게 따르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남친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은 수퍼히어로 여자친구의 나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비 덴트 때문에 표적이 된 후에 위험을 알면서도 브루스의 아파트를 떠난 대목에서 볼 수 있듯 레이첼이 브루스와 함께하지 않은 건 신변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 덴트는 방패막이 눈가림용 남친이 아니었다는 얘기지. 브루스는 그렇게 믿고 싶어했지만. 그에게 그 믿음이 필요한 것을 알았기에 알프레드는 편지를 태운 것이고.
자막에는 반영이 되지 않았지만 '브루스 네가 배트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은 오지 않을 거야.'라는 대사가 레이첼이 한 선택의 열쇠였다고 본다. 배트맨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고담시라기보다는 브루스의 어두운 면이었으니까. 그 그늘진 영웅의 모습에 가슴 설레는 수퍼히어로 팬이 아닌, 친구의 진실한 모습을 직시하고 공감하면서도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찾는 모습이 내게는 진실하게 와닿았다.
그런 면에서 브루스와 레이첼, 하비의 과거와 관계는 훨씬 깊이 탐색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액션 장면 넣느라 그런 거 할 시간은 없었겠지. 좀 더 인물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감정들을 보여주었으면 훨씬 마음을 끌어당기는 드라마가 되었을 텐데, 그 점은 아쉽다. 그래서 더욱 다크 나이트를 윤리극이라고 하는 것이고. 굉장히 끌리는 드라마를 암시는 하고 있지만 그쪽에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도덕적 딜레마와 잿빛 지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니까.
어쨌든 스파이더맨 이래 느꼈지만 수퍼히어로 여자친구 (혹은 짝사랑 상대)는 목청 하나는 좋아야 하는 모양이다. 추락하면서 내지른 레이첼의 '꺄아악!'은 압권이었달까. (...) 구출해준 배트맨에게 '이거 또 하진 말죠'라고 한 대사는 장르의 전형에 대한 패러디 느낌이 강해서 유쾌했다.
7. 그들은 정말 그래야 했을까. 불의에 대한 열혈 싸움을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다크 나이트는 잘 보여주고 있다. 시하야님 글에서도 드러난 문제의식이지만, 기득권층에게 힘을 급격히 빼앗아가려는 노력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든 아니든 부작용이 엄청나다. 그 강력한 사람들이 그냥 앉아서 홀랑 뺏길 것 같나. 반드시 싸움이 벌어지고, 희생자가 나게 마련이다.
비유하자면 공산주의 혁명과 복지국가의 차이 아닐까. 아무 규제 없는 자본주의에 말도 못할 끔찍한 불의가 많은 건 물론이다. 지금도 그런 게 많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놈들 끌어내리는 게 정말로 해결책인가? 그런 싸움은 또 그 자체의 불의를 일으키게 마련이고, 또 다른 절대 권력층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적을 잡아 없애는 데 주력하는 대신 경제적 구조를 정의롭게 바꾸고 중산층을 창조한 사회민주주의는 훨씬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리 불의와 싸운다고 해도 싸움이 일으키는 혼란은 그 자체로 불의하다. 범죄조직이 도시를 장악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덴트는 법, 배트맨은 폭력으로 싸우려고 든 것은 도시를 정말로 구해내겠다는 합리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싸우고, 이기고, 정복하라는 남성 호르몬의 부름에 대한 응답 아니었을까. 그래서 레이첼은 배트맨을 필요로 하는 것은 브루스라고 지적했겠지.
물론 악당이 활개를 치면 분한 건 맞고 저 나쁜 것들을 그냥 두면 안 되는 것도 맞는데, 곧이곧대로 맞서 싸우는 게 정말로 보통 사람들이 잘 사는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싶다. 그런 싸움은 정말로 새우등 터지기 십상인 약자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분한 마음과 영웅심 충족일까. 어찌 보면 그것도 다크 나이트라는 윤리극의 중요한 질문이라면 질문일 수 있겠지.
8. 하비 덴트의 삶과 죽음: 밥 먹으며 승한군에게도 한 얘기지만, 하비 덴트는 어차피 피부 이식 수술을 거부하고 소독도 안한 3도 화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니면서 오래 살기 어려웠다. 화상의 가장 심각한 부작용 중 하나가 감염이고, 괴사도 일어났을 테니 어차피 그게 퍼져서 오래 못 갔을 거다. 승한군 얘기대로 레이첼 없이 살기 싫다, 죽기 전에 한풀이나 하자는 생각이었겠지.
덴트가 그 경찰 가족 인질로 잡은 장면에서 레이첼이 그의 가족이었다고 했듯, 그가 천애고아라는 점은 그 피부이식 거부 건에서도 드러난다. 그 정도 화상을 입었으면 치료 거부는 죽겠다는 소리인데, 가족이나 누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정신 감정, 법원의 보호자 지명, 보호자의 치료 승인이 원래 과정이었을 거다. 하긴 뭐 도시가 난리가 나서 그럴 시간도 없었으려나.
사실 기왕 원작에서 벗어나는 김에는 나 같으면 덴트의 얼굴 반쪽은 그렇게 극단적인 화상 대신에 약간의 흉터와 긁힌 자국 정도로 처리했을 거다. 원작의 (그리고 영화의) 모습은 만화적 과장의 재미는 있지만 사실 레이첼의 죽음으로 드러난 또 다른 얼굴은 하비 덴트의 원래 얼굴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으니까. 화상의 끔찍한 모습은 덴트의 광기를 이질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실 그렇게 이질적이지 않은데도. 극도의 정의감은 그 자체 하나의 광신이나 광기가 아닌가?
그래서 히쓰 레져급의 배우에게 하비 덴트 역시 맡길 수 있었더라면 심한 화상 분장 없이 마음을 쥐어짜는 투 페이스가 나왔으리라고 보지만, 우선 그런 배역을 하기도 어려운 데다 조커가 그렇게 카리스마 넘치는데 투 페이스까지 그러면 주인공이라고 하는 배트맨은 정말 설 자리가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
9. 레이히 의원은 멋지다: 조커가 파티에 들이닥치는 장면에는 미국 상원 법사위 위원장인 민주당 패트린 레이히 (Patrick Leahy) 버몬트 상원의원이 까메오 출연했다. 학교 대선배고 얼마 전에 학교에 와서 강연도 했었는데, 연기가 필요없이 그냥 얘기하면 바로 용기와 위엄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분. 아래 클립에서 40초경부터가 레이히 의원 등장이다.
곁다리이지만, 아주 작은 것에서도 조커의 센스는 빛을 발한다. 클립 시작 부분에서 신사 (gentlemen)을 아주 약간 끝어서 말한 것만으로도 (gentle men, 얌전한 남자분들) 파티 손님들을 절묘하게 모욕하는 저 솜씨란.
10. 조커의 흉터: 얘기할 때마다 말이 바뀌는 흉터의 기원은 역시 조커가 스스로 그랬다는 게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유? 그런 게 왜 필요하삼. 자네 살기 싫은 모양이군? (...) 뭐 어쩌면 좋은 대화 소재라고 생각했을지도.
결론적으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허점도 있지만 꽤 깊이가 있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 보여준 승한군에게 감사를. 특히 애잔하고 공포스러운 조커의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죽음과 우연 외에는 공평한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 속에서 도시의 진창 한가운데를 뒹굴어야 하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그림자. 아무리 진창이라도 쉽게 떠날 수도 없는 이 도시, 우리의 고담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야 할지도 모르는 질문. Why so serious?
5번의 경우 사람들의 마음을 다그친 건 역시 폭탄의 존재를 확인한 것과 시간제한이라고 생각해. 폭탄이 장착된 것은 확인된 사실이고, 저쪽 배에도 장착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것도 정황적으로 사실이라고 생각했겠지. 결국 죄수의 딜레마하고는 다르게, 양쪽 모두가 협조를 해서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결국 둘 다 죽는 결과를 가져온다..라는 것 역시 믿었겠지. 만일 폭탄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면 누나 말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나왔겠지만, 폭탄이 분명히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아는 이상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 같아.
6번의 경우(브루스-레이첼의 관계)는 전작인 '배트맨 비긴스'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어서 이번 영화에는 생략했을 거야. 그 때만 해도 "배트맨이 필요없는 날이 오면 함께 있어줄께" 라고 했었는데(...) 전작에서도 똑같이 추락도 했었고;
어제는 '태어난다는 일' (The Business of Being Born)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제목 그대로 출산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특히 미국 산부인과에서 정상적인 출산에 하는 의학적 개입을 비판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해당이 많지 않나 싶다.
난 사실 여자답다는 소리는 별로 못 듣고 산다. 영화를 볼 때도 연인의 슬픈 이야기에 눈물 흘리거나 감동받는 일은 거의 없다. '저것들, 저러다가 또 몇 개월 지나면 멀쩡할 텐데.' (심드렁~) 그런 내가 정말 감동먹는 건 주로 부모와 자식 이야기다. 영화나 책을 보다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질 때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곤 하고.
어제는 저 다큐멘터리 보면서 눈물을 서너 번 펑펑 쏟았다. 아이를 자연분만하는 모습이 나올 때였는데, 엄마가 죽도록 힘든 진통을 거쳐 마침내 꼬물꼬물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얼마나 감정이 복받치는지. 아씨, 생각하니까 또 눈물 나네. 애를 낳아본 일도 없는데 여자라서 그런 것일까, 인간이라서 그런 것일까, 엄마 생각이 나서 그런 걸까. 진부한 말이지만 생명 탄생의 감동은 당사자가 아닌 관객인 나에게도 참 형언하기 어려웠다.
반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에는 감동이 아니라 공포가 먼저 느껴지더라. 경막외 마취를 하느라 산모 척추에 주사를 놓는 모습이라든지 (으앙 으앙 으앙 으앙 으앙), 누워서 억지로 크게 벌린 다리 사이로 의사와 간호사들이 의료도구를 들고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이나, 제왕절개... 으악, 제왕절개!!! 우욱. 그게 다 연출의 힘인지는 몰라도, 봐서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자연분만을 하는 모습에서 느낀 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 그리고 스스로 출산하는 여성의 힘이었다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에서 느낀 것은 철저하게 의사의 지시만을 따르는, 결정권을 빼앗긴 채 수동적이고 거의 기계적인 산모의 모습이었다. 기억에 남는 말 하나: "현대 의학은 여자에게 당신은 아이를 낳을 줄 모른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다고 출산의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집에서 자연분만을 하려다가 아이가 거꾸로 되어 있어서 급히 병원에 가 제왕절개를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옛날이라면 목숨을 잃었을 산모와 아이를 구해낸 현대 의학의 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출산은 병이 아니라는 거다. 비정상적이거나 위험한 출산 상황에서 확실히 의학적 개입은 빛을 발하지만, 어째서 정상적인 출산에까지 개입을 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병리와 위험을 예정하는 의학의 개입이 정상적 출산까지 위기상황으로 몰아가며, 산모와 아이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영화는 꽤 효과적으로 펼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분노했던 부분. 진통이 일정 시간 이상 길어지면 병원에서는 산모에게 피토신이라는 인공 옥시토신을 투입한다. 왜? 진통이 너무 길어지면 제때 침대를 비울 수가 없어지거든. 기본적으로 사업인 병원에서는 스케쥴 조절을 위해 진통의 길이마저 맞추는 것이다. 피토신은 강하고 긴 자궁 수축을 유도하므로 이게 심해지면 또 늦추려고 경막외 마취를 한다. (척추에 주사 싫어 우아앙) 그러면 이번엔 또 너무 수축이 늦어져서 피토신, 이번엔 빠르니까 마취...
그러다가 결국 자궁 속에서 이리 눌리고 저리 눌린 아기가 위험해지면 제왕절개를 하고 아, 이 위대한 현대 의학이여 하며 자축한다는 거지. 애당초 개입하지 않았으면 대부분 자연분만으로 끝났을 정상적인 분만을 굳이 위기로 몰아가고서 말야. 게다가 제왕절개는 돈도 더 되고 빨리 끝나는데 의사 입장에서는 안할 이유가 어딨나. 그리고 아이를 구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는 방어가 되는 법적 이유까지 있다. 그런데 그 속에 정작 산모와 아이의 복지가 끼어들 틈은 어디 있지?
게다가 흔히 아이를 낳는 자세 하면 등을 대고 누워서 다리를 위로 벌리는 걸 생각하는데, 사실 이 자세는 출산 자세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한다. 등을 대고 누우면 아기가 나와야 하는 골반은 오히려 좁아지고, 또 골반의 움직임이 있어야 아기도 쉽게 나오는데 움직임을 제약하니까. 사실 이 자세의 진짜 편의는 산모나 아이가 아니라 의사에게 있다.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운 자세인 쪼그려 앉는 자세하고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지.
정상 분만을 도와줄 사람이 의사가 아니라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어느새 사극에나 나올 것 같은 말이 되어버린 산파라고 영화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대다수의 출산을 산파가 돕고, 네덜란드는 출산의 1/3을 집에서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아사망률은 95%의 출산을 병원에서 하는 미국보다 훨씬 낮다. (미국의 영아사망률은 산업국가 중 최악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떨까 모르겠네.)
내가 보기에도 비상시에 의사의 도움을 빨리 받을 체제만 되어 있다면 '병을 고치는' 개념인 의사보다는 '애 낳는 걸 도와주는' 산파가 정상적인 분만을 예상할 수 있는 산모에게는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의학의 역할은 위험할 때 개입하는 거지 출산을 주도하는 게 아니니까. 의사라는 게 있기 전에도 애 낳고 살았거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그 기적적인 순간,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잡는 것이야말로 진짜 여성해방 아니겠는가.
덧: 내가 또 울었던 때라면 (그때는 분노였지만) 미국에서 낙태의 자유를 대폭 축소한 법을 합헌 선언한 Gonzales v. Carhart 결정을 읽었을 때였다. 난 출산을 보면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낙태의 자유를 100% 지지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다고 생각한다.
http://www.lokasenna.pe.kr/blog/entry/the-business-of-being-born낙태를 하는 것이 여성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산모의 몸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를 인위적으로 '제거'
조산원 같은 데가 우리나라에 있는지 몰랐네요. 영화에도 산부인과하고는 또 다른 birth center 얘기도 나오죠. 자연분만을 하면서도 의사의 도움도 바로 받을 수 있는.. 어차피 현대의 산파는 의학 훈련도 받고, 위험이 있어보이면 바로 의사에게 연락하는 역할도 맡지만요. 덕분에 저도 좋은 정보 얻었습니다.
바바라 스트레이샌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옛날 영화 '우리 옛날 모습처럼' (The Way We Were)을 봤다. 원래 연애 영화 잘 안 보는데, 줄거리 소개에 보니까 스트레이샌드가 맡은 역의 케이티가 좌파 운동가이고 극중 두 사람이 결국 깨진 이유가 50년대 맥카시 파동이라고 나와서 날름 낚였다지. 내가 또 보수와 진보의 충돌 얘기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스포일러 보기.
보고 나니 케이티가 좌파 운동가인 건 맞는데 (무려 공산주의자에 반전 운동가),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가 맥카시의 마녀사냥이라는 얘기는 거짓말. 그보다는 서로 너무 달라서 아무리 사랑해도 함께할 수 없는 두 주인공의 가슴 아픈 얘기다.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케이티가 오직 허벨이 좋아서 헤어지자는 남자에게 매달리고, 헤어진 후에 울면서 전화해 불러내고, 그렇게도 질색했던 헐리우드에서 결혼생활을 하면서 그렇게도 싫어했던 할일없이 시시덕거리는 사교 모임에 나가고, 정치적 신념과 열정에 대해서도 되도록 입을 다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상에 어떤 남자가, 어떤 사랑이 자존심이고 뭐고 버리고 자신의 모습마저 바꿀 가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한편으로는 케이티의 그런 모습이 씁쓸하고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로 궁금했다. 얼마나 사람을 좋아하면 그럴 수 있는 걸까, 정말로. 얼마나 안타까우면, 얼마나 놓치기 싫으면.
영화에서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얘기다. 정말 똑똑하고 재기 넘치는 여자들이 사랑하는 남자와 있으려고 교육이나 경력, 야망을 포기하는 모습. 남자들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고. 그리고 상대에게 맞추려고, 그들의 생활에 맞추려고 자신이 원하는 것, 믿는 것도 상당 부분 포기하고 희생하겠지.
좋거나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성 해방 선언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일 뿐. 그건 내가 특별히 주관이 뚜렷해서도 아니고, 사랑과 자아를 조화하는 멋들어진 비법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뭔가 희생할 만큼 남을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다. 희생이 숭고한 것이라고 한다면 '꿈'이나 '자아'만큼 숭고한 희생이 또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생명을 내주지만, 자아의 본질을 버리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이니까.
케이티는 그 서서히 죽어가는 삶을 결국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50년대에 맥카시가 레드 헌트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맞섰고, 이때 허벨과 한 싸움은 안전과 안정을 바라는 마음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정의감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잘 조명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우리만 다치는데 신념이나 이상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허벨은 호소하고, 불의를 뻔히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고 케이티는 다그치고.
그 말다툼은 새로운 싸움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싸움이었다. 오래전에 두 사람이 헤어졌어야 했던 이유였으며, 아무리 사랑해도 함께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들은 서로 너무 달랐고, 원하는 것도 달랐으니까. 몇 년 동안은 케이티의 일방적 희생으로 어떻게든 함께할 수 있었지만, 서로 밀어내는 압력은 결국 그 접착제에도 금을 가게 했지. 케이티는 끝내 자신이기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비극이며 가장 큰 승리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결국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얘기 중 하나다. 주변에서 보기에는 서로 행복하기 어려운, 헤어져야 할 한 쌍인데 본인들은 죽고 못 살아서 지지고 볶다가 결국 헤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사랑이란 흔한 얘기인 만큼이나 내게는 딴 세상 이야기다. 그런 게 있다는 것도 알고 중요하다는 것도 아는데 도통 나와는 상관없는 것. 마치 신이나 죽음처럼 알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는.
귀국 비행기에서 영화를 세 편 보았다. 정확히는 두 편을 보고 한 편은 보다가 포기했으니 2.5편쯤 봤다고 해야 할까. 이워 지마에서 온 편지 (Letters from Iwo Jima), 인간의 아이 (Children of Men), 드림걸즈 (Dreamgirls) 순서였다. 그 얘기를 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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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워 지마에서 온 편지 (Letters from Iwo Jima)
일본 병사 처지에서 본 태평양 전쟁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봤더니, 보면서 욕만 나왔다. 좀 나아지나 해서 끝까지 보고 또 욕했다. 패자의 입장은커녕 승자의, 그것도 서방의 우월감밖에 보이는 게 없는 굉장히 짜증 나는 영화.
물론 내가 일본 '편'이 아닌 건 당연하다. 이건 편 얘기가 아니다. 심지어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의미로도. 2차대전에서 일본이 진 건 우리한테도 천만다행이었고 아시아와 온 세계에도 위험한 군국주의 국가의 패망은 번영과 안정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말이다, 당시의 일본이 무능하고 바보 같은 미친 나라여서 미국이라는 거인을 긴장시켰나? 그런 규모의 전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산업 생산력 (물론 우리 같은 식민지 고혈도 많았고), 나바호 언어를 사용한 암호가 나오기까지 미국이 사용한 암호라는 암호는 다 깬 기술력... 군국주의 일본은 무서운 저력이 있는 위험한 강국이었다. 지금의 일본이 그렇듯이. 그런데 영화에서 나오는 일본이나 일본군 지도부의 모습은 더도 덜도 아닌 정신병자 집단이나 다름없다. 엉망이 된 지휘체계, 죽을 힘 다해서 싸워도 모자랄 상황에서 집단 자살, 밑도 끝도 없는 권위주의적 억지. 제정신이 박힌 건 미국물 좀 먹은 두 장교 뿐.
물론 특히 패색이 짙어지는 공황 상태에서 영화에서 나온 것 같은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사건도 많았겠지. 하지만, 다 거두절미하고 어떤 문화적 맥락도 없이 딱 그런 미친 모습만 보여주고서는 '이래서 우리가 이긴 거야.' 하는 식의 잘난 척은 정말 못 참아주겠다. 특히 미국인 병사의 어머니 편지를 (미국물 먹은) 장교가 읽어주는 동안 음악 깔고 병사들이 하나 둘 일어서는 장면에서는 화면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거기다 나중엔 인용까지... 얼씨구. 제작자들도 너무하다 싶었는지 미국인 병사들이 일본인 포로 살해하는 것도 보여주긴 했지만, 그 대목도 '그래서 어쩌라구?' 소리밖에 안 나왔다.
좋았던 건 딱 두 가지. 처음부터 영화를 본 이유였던 일본 병사들의 인간적인 애환이 나왔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였다는 점. 어차피 전쟁이란 국가가 자국과 적국의 국민에게 가하는 폭력이지, 적국 국민끼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범한 일본 국민에게는 감정 없고, 그들도 전쟁의 피해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반성 없는 현대 일본의 모습은 정부도 국민도 용서가 안 된다. 타국에 대한 범죄를 인정 못 하겠으면 일본 국민한테 잘못한 거라도 비판해야 할 것 아니냐.) 물론 남의 나라 전쟁에 죽어나가고 인생 망친 우리 조상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내는 아내의 모습 같은 데서는 눈물도 나더라. 그 외에는 별로 볼 거 없었던 영화.
그리고 보니 윈드토커 (Wind Talkers)도 잔뜩 기대만 했다가 실망한 태평양 전쟁기 영화였구나. 나바호 암호병은 책도 두세 권 본 소재인지라 특히 기대했었는데... 어째 태평양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하나같이 실망하게 되는 건지.
인간의 아이 (Children of Men)
뭔가 재밌을 것 같기도 했는데 비행기 소음 때문에 영국식 영어가 안 들려먹어서 결국 포기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절망과 폭력에 휩싸인 미래의 디스토피아가 꽤 실감 나더라. 어차피 불임 전에도 세상은 글렀었다는 말도 공감 가고. 인류 유일의 임산부가 주인공에게 모습을 보인 곳이 가축우리라는 상징성도 나름 기발했다. 나의 아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이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욕구인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달까. 들리질 않으니 내용 연결이 안 돼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던 게 아쉬웠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봐야지.
드림걸즈 (Dreamgirls)
제일 재미있게 본 영화. 노래들도 좋았고, 특히 에피 화이트라는 인물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자만심과 집착으로 몰락하고 긴 시간을 보내고서야 자신다운 모습과 목소리를 찾은 그 인생역정이 말이다. 연예계의 엇갈리는 명암, 그 속에서 뜨고 스러지고, 딛고 일어서거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인간 군상 표현이 굉장히 좋았다. 눈도 즐겁고 귀도 즐겁고, 마음도 즐거웠던 화려하면서도 감동적인 영화. 기회가 되는대로 다시 볼 생각이다. 원작 뮤지컬도 꼭 보고 싶고.
드림걸즈 대표곡인 And I Am Telling You I Am Not Going. 제니퍼 허드슨의 연기와 노래가 일품.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매달리는데도 주변 사람은 하나둘 떠나가는 그 안타까움이란...
그룹에서 쫓겨난지 거의 10년이 되어서 다시 일어선 에피의 재기곡, One Night Only. 커티스가 주도했고 에피가 밀려난 이유 중 하나가 된 드림즈의 가벼운 팝 사운드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기 목소리에 어울리는 진중한 감정과 삶의 무게를 담은 노래가 얼마나 멋졌는지 모른다. 커티스와의 아픈 추억도 녹아든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 곡.
One Night Only
하룻밤뿐
You want all my love and my devotion You want my loving soul right on the line I have no doubt that I could love you forever The only trouble is, you really don't have the time
내 모든 사랑과 헌신을 바라는 당신 내 사랑하는 영혼마저 차지하고 싶어하죠 당신을 영원히라도 사랑할 수 있지만 문제는 당신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어요
You've got one night only One night only That's all you have to spare One night only Let's not pretend to care
당신에게는 하룬밤뿐 하룻밤뿐 그밖에는 없죠 하룻밤뿐 그 이상 어떤 의미도 없어요
One night only One night only Come on, big baby, come on One night only We only have till dawn
하룻밤뿐 하룻밤뿐 서둘러요 당신, 어서 하룻밤뿐 동이 틀 때까지만
In the morning this feeling will be gone It has no chance going on Something so right has got no chance to live So let's forget about chances This one night I will give
아침이면 이 느낌도 사라지겠죠 계속될 리 없어요 이렇게도 완벽한 것이 끝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러니 미래일랑 잊어버려요 이 하룻밤을 줄게요
One night only One night only You'll be the only one One night only Then you'll have to run
하룻밤뿐 하룻밤뿐 오직 당신뿐 하룻밤뿐 그리고 당신은 가버리겠죠
One night only One night only There's nothing more to say One night only Words get in the way
하룻밤뿐 하룻밤뿐 더는 할 말이 없어요 하룻밤뿐 말은 방해만 될뿐
One night only One night only One night only...
하룻밤뿐 하룻밤뿐 하룻밤뿐...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과거를 딛고 일어선 에피의 당당한 모습이 얼마나 멋졌는지..ㅠㅠ 가수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성장한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전반적으로 참 재밌게 본 영화.
인종문제를 다룬 2005년작 영화 크래쉬 (Crash)를 DVD로 본 소감은... 으쓱. 잘 만든 영화긴 하다. 기술적 완성도도 높고, 연기도 대체로 좋고. 역시 무거운 소재를 다룬 군상극인 '매그놀리아'나 '트래픽' (구도는 좀 다르지만 '히트' 역시)의 계보를 잇는 야심작으로 보이지만 감동은 좀 덜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인물의 사연이나 동기에 대한 조명이 부족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지금 관객 갖고 노냐?'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기교는 좋되 뭔가 허한 영화.
스포일러다.
생각 1: 주제의식과 중심 이미지는 좋았는데, 그걸 꼭 영화 첫 장면 첫 대사에서, 그것도 그렇게 직빵으로 쏴줘야 하나. 그냥 관객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시간과 공간을 주었으면 더 좋았을걸. 산드라 불록이 연기한 부잣집 마나님은 오직 그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연기는 좋았다.
생각 2: 왜 사람이 그딴 식인지 그나마 공감이 갔던 게 라이언인가 하는 경찰이었고, 징징거리는 부잣집 마나님이나 말도 안되는 억지쓰는 가게주인 아저씨는 솔직히 짜증났다. 분명 나름 사연이 있을만한 인물들인데, 그런 사연들은 관객이 짐작할 뿐 직접 보여준 건 없으니 공감이 덜할 수밖에. 내가 왜 낯선 나라 이민와서 온갖 괄세와 사기에 시달렸을 선량한 가장보다 경찰 직권 이용해서 길거리에서 남의 아내나 만지작거리는 인간말종한테 공감해야 하냐고.
어, 그리고 부잣집 마나님은 영화 내내 찌질거리다가 멕시칸 가정부하고 끌어안고 끝난다 이거지. (그 가정부 아줌마 인상 한번 푸짐하더라. 인디오 피가 강해보였다.) 그걸로 갑자기 용서가 될 것 같냐, 대사의 대부분이 인종차별 아니면 짜증이었는데.
생각 3: 관객 감정 쥐었다 놓기와 반전을 위한 반전. 말했듯 기술이나 기교가 부족한 영화는 결코 아니어서, 감정을 적당히 고조시키고 흥을 돋구는 건 잘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약간 뻔하긴 하지만 용서할만은 하다. 하지만 관객을 갖고 노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자물쇠 수리공의 어린 딸이 총에 맞은줄 알았던 장면이라든지, 두 경찰의 엇갈린 운명이라든지.
두 경찰에 대해서 말인데, 성인 관객이라면 누구나 세상에는 절대적 악인이나 선인은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굳이 관객 머리에 때려박으려고 그렇게 극단적인 결론으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 인종이 뭐든지 간에 히치하이커 태우는건 하지 말자는 공익광고 역할은 톡톡히 했지.
생각 4: "조진구! 조진구우우우!" 한국 아줌마가 남편 이름을 저렇게 막 부르는 경우도 있나? "아무개 아빠!" 혹은 "진구씨!" 아니려나. 이민 2~3세쯤 돼서 그러려니하고 납득하기에는 영어가 어설펐고 말이다. LA에 한국계가 얼마나 많은데 저거 하나 확인해줄 사람이 없었냐. 그리고 우리의 조진구씨가 당장 가서 캐쉬하라는 수표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내 머리로는 납득불능.
그럭저럭 재밌게 본 영화긴 하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을 긁는데가 있고,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좀 부족한 작품. 생각없이 보기엔 나쁘지 않다.
Farinelli Il Castrato (카스트라토 파리넬리)는 제목 그대로 18세기의 유명한 카스트라토 까를로 브로스키, 예명 파리넬리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만큼 뭐, 허구적 가공은 필연적으로 들어갔지만. 아이팝에서 공짜로 해주길래 보느라 밤늦게까지 감동먹었던 영화이다. (시하야님도 끌어들여서 둘이서 MSN으로 수다떨면서 봤다는 전설이..) 수려한 영상과 아름다운 노래, 배신과 증오를 뛰어넘는 예술혼과 사랑, 마지막에는 용서와 화해로 이어지면서 줄곧 사람을 놔주지 않는 감정선...
특히 한참 옛날 노래들인데도 파리넬리가 초기에 불렀던 형의 노래들과 나중에 핸델의 노래를 부를 때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특별히 클래식에 정통한 것도 아닌데도 기교만 부리고 가벼운 곡과 진중한 감동을 주는 곡은 내가 듣기에도 차이가 났다. 영화에서 핸델이 파리넬리의 적수로 나오지만, 그러면서도 파리넬리의 목소리를 진정 해방시켜준 것도 핸델이었다는 것은 참 역설적.
Venti, Turbini (바람이여, 회오리여) - 1절
Di speranza un bel raggio Ritorna a consolar l'alma smarrita; Sì adorata mia vita! Corro veloce a discoprir gl'inganni; Amor, sol per pietà, dammi i tuoi vanni!
희망의 서광이 다시 한번 내 요동치는 영혼에 비추게 하라 사랑하는 이여! 나를 기만한 자들을 치러 이제 달려가니 사랑의 큐피드여, 불쌍히 여기어 날개를 달아주오!
카스트라토란 참 여러가지 면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입을 여니까 소프라노 목소리가 나오는데 한편으로는 소름끼치면서도 얼마나 멋진지... (영화의 목소리는 낮은 소프라노와 테너를 합성했다고 들었다.) 카스트라토가 거세된 남자이면서도 의심의 여지 없이 '남자'라는 점이라든가, 생식력이 없으면서도 성욕도 있고 여자들이 따르는 점이라든지.. (실제로 성욕 자체는 적을지 몰라도 거세된 남자들도 발기도 되고 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존재가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끝없는 갈등과 변화, 경계의 재편성이 있게 마련이다. 파리넬리가 바로 그렇다.
카스트라토의 역사는 의외로 19세기 후반까지도 이어져서, 가장 늦게까지 유지했던 이탈리아가 1870년에 법으로 금지했다. 1902년 레오 13세의 포고로 영원히 교회 음악에서 카스트라토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교회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카스트라토 알레산드로 모레스키가 1913년 떠나갔으니, 카스트라토가 사라져 간 것은 아주 옛날 일도 아닌 것이다.
Venti, Turbini - 2절
Venti, turbini, prestate Le vostre ali a questo piè! Cieli, numi, il braccio armate Contro chi pena mi diè!
바람이여 회오리여, 나의 발걸음에 그대들의 날개를 빌려주오 하늘이여 신들이여, 나의 팔을 강하게 하소서 나에게 고통을 준 자들에게 대적하도록!
현대에는 매우 드물게 거세 없이 호르몬관계가 비정상인 카스트라토나 특수훈련을 받아 카스트라토 음역을 내는 가수는 있을지 몰라도 음악을 위해 어린 소년을 거세하는 야만적인 풍속은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해도 가수로 성공하는 비율은 극히 낮았다는 점이 또 비극이지만...) 실제로 당시에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된 곡 중에는 오늘날에는 공연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비록 잔혹한 야만성의 산물이지만 파리넬리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아름다움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카스트라토를 부자연스러운 존재라고 혐오한 영화 속의 핸델마저도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비인간적 풍속이,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천상의 목소리는 그 고통의 깊이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처럼...
Lascia ch'io pianga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E che sospiri la libertà.
Il duolo infranga queste ritorte
De' miei martiri sol per piet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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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흥! 재미있는 오락영화를 애써 폄훼하다니!
폄훼라니 비평이얏!
아바타는 정말 수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에 압도당해 멍하게 있다가 나와서 "잘봤네. 너도 봐라." 하는 목적으로서는 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편이라는 (낮은 문맹률이라던가 기타 등등) 우리나라에서도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한달에 책 한권을 읽을까 말까 합니다. 대중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를 매체로부터 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압도적인 영상과 음향으로 멍하게 앉아 있다가 나오게 하느냐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와버렸습니다. 당장에 그 쪽이 돈이 되니까요.
(지독한) 편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 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등 - 가 21세기에도 나왔는지, 저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오직 문학으로 전달될 때 빛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이래서 저는 활자중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회사가 책 읽을 시간을 빼앗아 갑니다. 죽겠습니...)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영화가 요즘에 없나? 월-E도 꽤 수작이었고, 밀양도 좋았고, 다크 나이트라든지 드림걸즈라든지 이번에 아카데미 작품상 탄 허트 로커라든지.. 이야기가 좋은 영화는 찾아보면 많은데, 흥행도 괜찮은 게 많고. 뭐, 드라마는 또 말할 것도 없고. 배틀스타 갤럭티카, 더 와이어, 하우스, 로스트 등등. 소설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영화로 전달하는 게 더 효과적인 얘기가 있는 법이고, 영상 기술은 영화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저 영상과 음향에 멍해져 있다 나온 1인으로서
뒤늦게 로키님의 비평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공감이 가는 점이 많네요.
하긴 넷에서도 주인공 제이크의 선택에 대해 군인크리VS예쁜 애인잡아 잘먹고 잘살기중에 어느쪽을 선택할지는 자명하지 않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죠.
개인적으론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전(?)상사인 그 대령이 마지막에 꼭 액션게임의 보스같은 전형적인 분위기를 너무 티나게 풍겨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바타의 성공은 결국 영화 트랜스 포머처럼
역시 영화의 기록적인 성공이란 스토리가 아닌 영상기술에 달려있는것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되는군요.
씁쓸하죠, 스토리가 아닌 돈과 기술로 승부하는 게 남는 장사라면. 그래도 뭐 좋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공급과 수요가 모두 계속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뱀프군처럼 포기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대령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전형적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더 그랬죠..ㅋㅋ 스토리 자체가 전형적인 요소가 참 많았어요. 그 전형성을 창의성으로 신선하게 녹여내지 못한 게 아쉽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