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애경력이 꽤나 일천한 사람이다. 대학 1학년 때 채팅을 통해 만나서 잠깐 사귄 애는 아마 손도 안 잡아봤던 것 같고, 제대로 된 이별도 없이 흐지부지 연락이 끊어졌었다. 당연히 슬픔이나 이별의 아픔 따위 있었을 리도 없고, 연애라고 하기도 거식할 정도로 싱거웠다. 그리고 나서는 건강이 안 좋기도 했고 연애에 별 관심이 없기도 해서 10년 동안 싱글로 지내다가 서른 다 되어서 지금의 남친을 만났고, 2년 좀 넘게 사귀고 있다.
이런 나한테도 연애 상담이 들어오곤 하는데, 그 중 반 정도는 짝사랑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녀 (거의 그녀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 것인가, 연애 한 번 못해보다니 나는 왜이렇게 못난 놈인가 등등. 듣다 보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짝사랑만큼 간단한 문제도 없는데 답답하기도 하다. 애인과 어떻게 하면 가까워질 것인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은 한결 복잡한 문제지만 (그조차도 기본원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짝사랑은 사실 한 가지 원칙밖에 없어서 답은 간단하다. 비록 쉽지는 않지만.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이기도 하겠다, 크리스마스가 너무나 추웠던 싱글들을 위한 짝사랑 5단계 공략법을 소개하겠다.
1. 우선, 고백할 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보라.
모든 마음이 다 연애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쟤 괜찮은데? 하고 보면서 행복하고, 가슴 설레고, 그것만으로 충분한 호감도 세상에는 많다. 2~5단계에서 말하고 있지만 상대에게 제대로 고백하고 관계를 시작하려면 용기를 내야 하고, 거절당하는 위험부담도 감수해야 한다.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연애라는 만만치 않은 인간관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마음이 강한지, 그만큼 원하는지 심사숙고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마음이 호감인지, 호기심인지, 우정인지, 성욕인지, 집착인지, 욕심인지, 외로움인지, 아니면 걷잡을 수 없는 순애보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흔히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은 저 모든 것이 다소간에 들어있다. 연애를 하는 이유는 어차피 다양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에게 당당하게 진실대로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거절당해도 감당할 수 있다면 청신호다. 2단계로 가도록.
고백할 만큼 강한 마음이 아니라면 5단계 정리 단계로 넘어간다. 고백하지 않겠다는 것은 짝사랑으로, 친구로, 혹은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선택이다. 당신은 연애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고, 그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선택이므로 난 왜 이렇게 불행할까 하고 자신과 주변을 괴롭히지 말기 바란다. 특히 주변을 막연하게 맴돌면서 선물 공세를 하는 것 같은 삽질은 금물이다. 고백하지 않겠다면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어떻게 잘해줘서 그쪽이 고백하게 만들겠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는 비겁한 발상이다. 자세한 사항은
삽질 글을 참조하도록.
2. 둘째, 둘이 만나자고 하라.
둘이 만나야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화로, 문자로, 사무실에서, 친구들하고 모여서 술마시면서 다 소용없다. 정식으로 하는 방법은 만나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도 지금의 남친한테 인터넷으로 고백을 받았고, 같은 원리로 러브레터를 보내는 것도 고전적인 방법이다. 특히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어느 정도 아는 사이면 편지는 마음을 전하기 너무 쑥스러운 사람에게도 괜찮고 낭만도 있는 방법이다. 편지를 쓴다면 4단계로 바로 넘어가도록. 그래도 역시 거리가 멀지 않거나 특히 잘 모르는 사이면 만나는 것이 정석이라고 본다. 그래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며, 마음을 직접 전할 수 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신다거나, 그만큼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차를 마시는 약속을 잡아라. 술김에는 별별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있으니 술자리 약속은 좋지 않다. 그 외에 상황에 따라서는 정식 데이트처럼 밥도 먹고 영화도 보는 등의 약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약속이든지 둘이 앉아서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확보하도록 하라.
만나주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마음이 간절하고 특히 상대의 거절이 진심이 아닌 것 같으면 설득해 보고, 상대가 정 단호하다면 꿈 깨고 5단계 '정리'로 넘어가면 된다. 둘이 만나기도 싫으면 연애는 어차피 안 되는 거다. 괜히 주변을 맴돌면서 삽질하거나 범죄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면 깨끗이 포기하는 것이 좋다.
3. 셋째, 그 사람을 알아가라.
만나주었다면 반은 된 것이니 축하할 일이다. 이제 남은 것은 대화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낼 사항도 그만큼 적어지겠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어림짐작이라면 확인을 해보도록. 애인이 있는지,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지, 연애할 의사는 있는지, 어떤 연애를 바라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등등 모르는 것이 있다면 물어봐서 알아내면 된다. 물론 취조하듯 할 필요는 없고,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가면 된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물어볼 수도 있고, 될성부른 떡잎이라면 이러면서 분위기가 어느 정도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화하면서 상대의 생활이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으면 고백할지 결정하라. 아직 부족하면 몇 번 더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왠만해서는 이쯤 되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좋아, 꼭 사귀고 싶어! 하면 4단계, 고백으로 넘어가도록 하라. 얘는 영 아니네~ 라거나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면 5단계 정리 단계로 넘어가라.
4. 넷째, 확신이 서면 무엇을 원하는지 진실하게 말하라.
가장 어려운 단계이기도 하지만, 꼭 필요하기도 하다. 확신이 섰다면 마음을 전하도록 한다. 말로 할 수도 있고, 편지를 전해줄 수도 있다. 만나서 편지를 전해주는 것도 봤는데, 그 역시 괜찮은 방법이라고 본다. 어떻게 전하든 좋은 고백에는 대체로세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자신의 마음이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정확하고 진실하게 전해야 한다. 정말 너 없이는 못 살겠으며 지구 끝까지 쫓아갈 세기의 순정이라면 그렇게 전해도 좋지만, 그런 고백은 보통은 좀 무섭고(..) 또 일반적으로는 과장이 심하다. 정말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자신의 진심을 말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필자는 '너 마음에 든다. 내 여자친구 해라.' 하는 (정말 저 두 문장이 다였음) 고백도 받아봤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어디를 가든 변하지 않는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장문의 고백도 받아봤는데, 둘다 진실하고 좋은 고백이었다고 생각한다. 첫 문단에서 나의 일천한 연애 경력을 얘기했지만 연애 기간과 관계의 깊이도 마음의 깊이에 비례한 것 같다.
결국 그 마음이 지나가는 호감인지, 걷잡을 수 없는 순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확하고 진실하게 말해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가벼운 마음이라면 아마 가벼운 연애를 원할 것이고 (물론 사귀면서 깊어질 수도 있다), 깊고 절절한 마음이라면 아마도 그만큼 심각한 연애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들어보고 선택하는 것은 상대의 몫이다. 자신과 상대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상대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진실해야지, 가볍게 사귀어보고 싶은데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식의 뻥은 사기다. 그리고 상대가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스트레스와 이별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거짓된 기반 위에 좋은 관계를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 사귀어!!'처럼 단순명쾌할 수도 있고, '사귀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이상으로 누군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전해서 위로하고 싶었다'는 식으로 좀 더 은근한 욕구일 수도 있다. 첫째 요소인 마음을 제대로 전했다면 이건 자연스럽게 나오거나 아니면 암시가 되지만, 그래도 확실히 의도를 밝히는 편이 상대가 결론을 내리기에 좋다.
셋째, 상대가 하거나 하지 않을 행동을 구체적으로 부탁하는 것이다. 보통은 사귀자는 요청에 대해 가부를 알려주는 것이고, 그냥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일 수도 있다. 첫째와 둘째 요소, 즉 자신의 마음과 원하는 것을 밝혔다면 보통은 따로 안해도 되지만, 추가적으로 부탁이 있으면 (출국하기 전에 답변을 달라거나,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거나) 추가로 얘기하면 된다.
이렇게 확실하게 고백을 하고 상대가 질문이 있다면 답하면 된다. 이제 공은 상대에게 넘어가서 어느 쪽이든 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면 고백이 좋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상대의 반응을 살필 수 있고, 상대는 대답을 회피하기가 어려워진다.) '좋아! 사귀자!'가 보통 가장 긍정적인 답변일 것이고, 사귀기 싫다거나, 시험적으로 몇 번 데이트를 해보자거나, 생각할 시간을 달라거나 등등. 거절에 이유를 대지 않는다면 물어보아도 좋다. 다만, 이쪽도 저쪽도 아닌 채 오랫동안 끌고간다면 (구체적인 기한이나 조건 없이 자기 상황이 정리되면 답을 주겠다거나) 우회적인 거절이거나 어장관리일 수 있으므로 너무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좋다.
5. 다섯째, 연애하라/정리하라.
고백을 하고 마침내 확답을 받았다면 어느 쪽이든 짝사랑은 끝난 것이다. 연애를 시작했거나, 아니면 마음을 접을 때가 되었거나. 어쩌면 이 순간이 두려워서 그간 고백을 미루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여기까지 올 만큼 분명한 마음을 품고 용기를 낸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연애뿐 아니라 삶 자체의 교훈을 얻은 것이니까. 진지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원하고, 이루기 위해 자존심이든 마음이든 시간이든 뭔가 걸고 노력한 후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마음을 열고 상처를 감수하는 고백이란 더욱 큰 용기이며, 그것은 곧 자신과 생(生)을 사랑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간단하되 결코 쉽지 않은 용기를 낸 자신에게 따뜻한 축하를 보내기 바란다.
상대가 다행히도 승낙했다면, 연애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짝사랑은 끝났지만 이제 연애라는, 어찌보면 더 어려운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연애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거라고 생각한 꼬꼬마라면 지금이라도 깨몽!! 사람이 살면서 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연애는 마법이나 구원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인간관계일 뿐이다. (설마 연애하는 상대가 동물이나 외계인이나 상상 속의 인물은 아니겠지.) 진지한 관계일 수록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끝없이 대화하고, 많이 공부해야 한다. 통계상으로는 결국 이별을 맞이하고 그 아픔을 견뎌야 할 확률도 대단히 높다.이 사람과 결혼해서 백년해로를 하든, 하루만에 대판 싸우고 헤어지든 성장과 배움의 여정을 함께 시작한 것이다.
상대가 거절했다면 거절 역시 끝이 아닌 시작이다. 짝사랑이 깊고 길었다면 그만큼 상처도 클 것이다. 별로 진지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자존심에 생채기조차 안 났을 수도 있다. 상처가 남았다면 자신을 추스르고 위로해주도록 하라. 친구를 만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머리를 한다거나, 여행을 간다거나 해서 기분을 전환할 수도 있다. 환경을 바꾸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등 변화를 주어보는 것도 좋다. 생활이 망가지기 쉽거나 스트레스성 폭식, 과소비 경향이 있다면 자신을 아끼는 친구나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서 제어를 하도록 한다. 충분한 수면과 규칙적인 식사, 정기적인 운동은 건강의 삼위일체이고 우울한 기분을 회복하는 데도 좋으니 반드시 지키도록 한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고 감싸면서, 호흡 하나하나마다 건강한 생활과 좋은 생각으로 자신을 사랑하다 보면 상처는 희미해질 것이다. 흉터가 남는다면 그건 전장의 상흔처럼 영광스러운 것이다. 아무 혼란도, 불확실성도 남기지 않는 명확한 결론을 얻었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성과이다. 준비가 된다면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거나 누군가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해도 된다. 지금은 자신을 아껴주는 데 주력하도록 한다. 자신을 아껴야 타인도 아낄 수 있고, 자신을 존중해야 존중받는 연애를 할 수 있는 법이다.
참고로 이 글은 정석일 뿐이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 필자 본인은 정작 이 단계를 1~5번 순서대로 밟은 적은 없다. 대학 때 진행은 다른 일로 만났다가 (2) -> 잠깐 얘기하다가 (3) -> 고백 (1, 4) -> 싱거운 연애 시작 (5)이었고, 현재 연애는 친구로서 오래 지내다가 (3) -> 고백 (1, 4) -> 귀국 후 만나서 (2) -> 내가 사귀자고 해서 지금까지 연애 중 (5) 이라는 진행이었다. 다만 눈치챘겠지만 순서는 어떻든 대개는 어떤 식으로든 밟는 단계이기는 하다. (평생 대면 안하고 인터넷과 전화로만 얘기하는 연인 같은 경우도 약한 의미에서는 2단계를 충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순서 자체가 절대지는 않지만, 하나의 모델로서의 가치는 있다.
말했듯 짝사랑의 해법은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모두가 마음을 감추고 계산하고 재는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내놓고 상대의 선택에 맡긴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연애하기 원한다면 용기를 내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요행히 상대도 같은 마음이라서 먼저 다가올 수도 있지만, 역으로 상대도 망설이느라 같은 마음이면서도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사귀고 싶다면 미루지 말고 당당히 고백하는 것만이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해법이다. 크든 작든 진정 가치있는 것은 용기 없이는 얻을 수 없게 마련이니까.
참고자료:
닥터엘 연애상담소: 짝사랑 - 연애상담의 절대강자 닥터엘 상담소의 '짝사랑' 태그이다. 가끔 가서 글 볼 때마다 정말 인생 공부 많이 한다. 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적은 5단계 역시 결국은 엘님의 상담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짝사랑 얘기뿐만 아니라 사이트 전체에 정말 주옥같은 글이 많으니 비단 연애문제가 아니라도 마음이 답답할 때 한 번씩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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