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감동, '축복하소서'
읽어보니 짠한 정도가 아니라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 가난과 장애, 고된 노동 속에서도 사람 사는 냄새는 여전하다는, 상투적이지만 진실한 감동의 재확인. 특히 2~4연은 정제된 언어와 잔잔하면서도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시상에 가슴이 뭉클했다. 극중 연주와 호섭처럼 나도 외워볼 생각인데, 읽을 때마다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 눈물이 고여서 남 앞에서 낭송은 못하게 생겼다. 그 외에도 각자 열심히 살아가며 서로 돕고 각자 삶이 고단하고 기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고 삐딱한 성격에 감동만 먹고 끝나면 이상하지. (내가 가끔 드라마 속 작은삼촌 병걸하고 비슷하다.) 김수현 작가는 드라마 속에서 2~4연을 집중적으로 인용하는데, 1연부터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나도 보기 시작하면서 '으잉?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 했으니까. 아무리 다산을 장려하는 시대라지만 (자녀 9명쯤 되면 아마 주택청약 0순위일 듯) 10 자녀를 넘나드는 다산의 의학적, 경제적, 사회적 폐해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으리라 본다. 피임의 선구자 마가렛 생거의 어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는데, 18번 임신하고 11명의 자녀를 낳은 후 5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생거가 괜히 온갖 비난과 위협에 시달리며 평생 피임 운동을 했겠나.
물론 가족계획, 혹은 1연에서 찬양하는 가족계획의 부재는 본인과 가족의 선택 문제이다. 생거 같은 이들의 활약 때문에 이제는 선택의 문제가 되었으니까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인 건 당연하다. 감자농사 짓는 촌부가 농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듯 자식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아이들이 집안을 뛰어다니는 것을 얼마든지 행복으로 삼을 수도 있다. 애한테 꼭 돈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고, 아이의 혼돈과 불편을 싫어하며, 자기든 아이든 경쟁에 뒤처질까 눈에 불을 켜는 현대 부르주아의 불안불안 양육보다 어찌보면 얼마나 대담하고 순수한 모정인가. 그저 부르주아 아녀자로서 굳이 나의 계층을 위한 변명을 해보자면 꼭 많이 낳아야 위대한 모정은 아니라는 것일 뿐이다.
또 하나 뜨악했던 것은 마지막 9연이다. 뼈빠지게 일하고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부자 욕하지 않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폐 안 끼치고 불법 안 저지르는 사람을 축복하라는 것은, 즉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잘못된 법을 고치자고 하며, 거리에서 데모하는 일꾼은 축복 대상에서 빠진다는 것인가?
물론 모든 걸 남 탓을 하고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안하면서 세상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는 피곤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은 일꾼이 아니라 그냥 밥버러지니까 축복받거나 말거나. 반면, 사회에 대해 불만이나 비판이 하나도 없이 사회는완전히 공평하니까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바보다. 사회는, 그리고 경제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다. 부자와 기업은 조직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데 중산층 이하는 응집과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아니 일부러 못하게 하니까 노동조건이 점점 열악해지고 삶은 피폐해지는 것 아닌가. 이 시 9연에서 이야기하는 착하고 얌전하고 말썽 안 부리는 밥벌이꾼은 아무리 정치와 법이 불공평해도, 노동력과 임금과 삶을 착취당해도 '그저 소박한 행복이 최고랑께~'를 외치는 '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1연의 다산모 내용을 보면 시인이 아마도 카톨릭 교도인 듯해서 더 연상이 되지만, 시를 보고 브라질의 대주교 헬데르 까마라 (발음 맞나?)가 한 말이 떠올랐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나더러 성인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가난을 순전히 개인적인 자선의 문제로 보고, 가난의 근본적 원인을 해소하는 사회적 개혁을 논하는 것은 터부시하는 빈곤의 낭만화는 결국 교회와 권력의 결탁 아닐까?
적선도, 성금도 좋고, 무료급식소도 좋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선의를 어떻게 삐딱하게만 볼 수 있겠나. 개선과 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실업자 신세에도 매달 후원금을 내고 있다. 하지만 자선이나 감사하게 받고, 혹은 뼈빠지는 일이나 열심히 하고 영원히 가족 부양에도 허덕이며, 그저 부자 욕 말고 얌전히 있다가 가끔 눈시울 뜨거워지는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 가난한 이에게 주어진 몫의 전부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 성원으로서의 권리이자 의무를 다하려면 조직도 하고, 정치 참여도 하고, 불평과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안 착한' 일꾼이 될 필요도 분명히 있다. 물론 그렇다고 틈틈이 동리 구멍가게로 달려가 소주잔 기울이지 못할 이유도 없고.
나하고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축복하소서'의 시적 완성도나 노동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난을 접하면 감상에 빠졌다가도 비판의 가시를 세우게 되는, 완전히 우로도 완전히 좌로도 치우칠 수 없는 중도층 중산층의 자기모순인 거지 뭐.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천차만별로 살아가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게 사회 아닌가. 일용직 노동자에서 외과의사까지, 살림살이는 달라도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닐 게이먼 (Neil Gaiman)의 샌드맨 1권 (Sandman: Nocturnes and Preludes) 마지막편, '그녀의 날개소리'에서 본 후 계속 마음에 남았던 시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내일이 마지막회던데.. 나도 요즘엔 거의 안보다가 오늘 모처럼 봤네.
난 이제 좀 힘빼고 지내는편. 고민하던 부분도 그냥;; 소식이 좀 뜸했잖아 ㅎ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의식이 깨어있는 모습이 멋져보여 끄적이고 감!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땡큐~ 고민이 덜하다니 다행이다 ㅎㅎ 난 오늘도 또 몇 편 정신없이 봐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