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search result of '문학' : 4

  1. 2010/11/04 삐딱한 감동, '축복하소서' (2)
  2. 2009/03/10 죽음을 위한 찬가 (4)
  3. 2008/11/08 농담
  4. 2008/04/05 한 번만 더. (2)

삐딱한 감동, '축복하소서'

요즘은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본방사수는 아니고 VOD로 한꺼번에 보다 보니 지난주에 한 이틀 정도는 드라마만 보며 폐인으로 지내기도 했다. 덕분에 어제는 밀린 일 하느라 샐러드와 파워바만 먹고 종일 뛰어야 했으니, 오호 통재라.

이것저것 하고싶은 얘기가 많은 드라마이지만 일단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극중에 나오는 '축복하소서'라는기도문이다. 다이빙에 미친 청년 호섭과, 호섭의 요리연구가 어머니의 제자인 연주가 마음을 키워가는 동안 연주가 호섭에게 소개하는 기도시인데, 호섭도 그랬지만 나도 몇 구절 듣고 코끝이 찡해졌다. 각자 열심히 일하고 자기 몫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이 드라마와 어울리는 노동 찬가이기도 하고, 연주처럼 나도 보고 힘을 내고 싶어서 한 번 찾아보았다.
각자 읽고 판단하는 거니까 먼저 시 본문을 적어놓고 더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정말 좋은 시이니까 읽어봐서 손해는 안 날 거다. 본문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홈피에서 퍼왔다.


축복하소서

하느님,
당신의 사랑과 권능으로 축복하실 양이면
먼저 정직하고 성실한 밥벌이꾼들을 축복하소서.
저들의 건강한 아내들을 축복하시되,
아홉 남매를 낳아 기르느라 힘들어도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셨음을 감사하여
번째 잉태를 허락하시면 기꺼이 낳겠다는
위대한 모정에 축복하소서.

모든 정직한 생산자들을 축복하시되
평생 천직으로 알고 농사지은 밭에서
햇감자를 수확하며
갈퀴 손으로 웃음을 가린
소박한 행복마저 내보이기 수줍어하는
촌부에게 축복하소서.

장님이면서도 병약한 아내를 위해 장작을 패고,
자전거를 타고 동리 구멍가게로 달려가 나무 탁자에 걸터앉아
살가운 평생 이웃들과 소주잔을 나누면서
그게 자신이 사는 행복이라고 웃으며
동리 품앗이가 줄어들게 걱정이라 하는
애옥한 삶에게 축복하소서.

여린 손으로
어린 동생의 밥상을 차려내고
빨래를 하며 연탄을 갈아도
눈물을 감추고 동생을 다독이며
어서어서 자라 간호사 되겠다고
꿈꾸는 소녀가장을 축복하소서.

산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겨울이면 굶는 새들을 위해 먹이를 날라다 뿌려주며,
어쩌다 산행 지척에서 뻐꾸기 우는소리를 들은 날은
뜻밖의 행운이라 즐거워하는
산사람에 축복하소서.

동냥 그릇에 지폐 장을 가만히 놓고는
마치 너무 약소해 미안하다는 듯이
뛰어 사라지는 소녀의 마음과
비탈진 골목에 컨베이어를 만들어
독거노인 집에 연탄을 날라 재어주는 인정과
병든 노인을 찾아가 청소를 하고 목욕을 시켜주는
청년들의 선행에 축복하소서

인간은 최선을 다하여 치료할
치유하는 이는 하느님이시니
행여 실수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범벅이 되어 나오는
의사에게 축복하소서.

박봉에서 성금을 헐어
매달 또박또박 자선단체에게 송금하는 성의와
무료급식소에서 짓고 설거지하는
사제와 목사와 봉사자들의 아름다운 손들과
곳곳에서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은
도우미로 봉사하는 이들 모두에게 축복하소서.

아무리 뼈빠지게 일하고
나보다 못한 삶만 내려다보며 살아도
고작 가족 부양에 애면글면 허덕이는 처지에도
공연히 부자를 욕하지 않고
부정한 돈을 탐내지 않으며,
세금 꼬박꼬박 납부하고
이웃에 끼치지 않고 질서와 법규를 충실히 지켜 사는
보통 사람들에게 축복하소서.

(박종형)


읽어보니 짠한 정도가 아니라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 가난과 장애, 고된 노동 속에서도 사람 사는 냄새는 여전하다는, 상투적이지만 진실한 감동의 재확인. 특히 2~4연은 정제된 언어와 잔잔하면서도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시상에 가슴이 뭉클했다. 극중 연주와 호섭처럼 나도 외워볼 생각인데, 읽을 때마다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 눈물이 고여서 남 앞에서 낭송은 못하게 생겼다. 그 외에도 각자 열심히 살아가며 서로 돕고 각자 삶이 고단하고 기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고 삐딱한 성격에 감동만 먹고 끝나면 이상하지. (내가 가끔 드라마 속 작은삼촌 병걸하고 비슷하다.) 김수현 작가는 드라마 속에서 2~4연을 집중적으로 인용하는데, 1연부터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나도 보기 시작하면서 '으잉?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 했으니까. 아무리 다산을 장려하는 시대라지만 (자녀 9명쯤 되면 아마 주택청약 0순위일 듯) 10 자녀를 넘나드는 다산의 의학적, 경제적, 사회적 폐해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으리라 본다. 피임의 선구자 마가렛 생거어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는데, 18번 임신하고 11명의 자녀를 낳은 후 5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생거가 괜히 온갖 비난과 위협에 시달리며 평생 피임 운동을 했겠나.

물론 가족계획, 혹은 1연에서 찬양하는 가족계획의 부재는 본인과 가족의 선택 문제이다. 생거 같은 이들의 활약 때문에 이제는 선택의 문제가 되었으니까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인 건 당연하다. 감자농사 짓는 촌부가 농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듯 자식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아이들이 집안을 뛰어다니는 것을 얼마든지 행복으로 삼을 수도 있다. 애한테 꼭 돈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고, 아이의 혼돈과 불편을 싫어하며, 자기든 아이든 경쟁에 뒤처질까 눈에 불을 켜는 현대 부르주아의 불안불안 양육보다 어찌보면 얼마나 대담하고 순수한 모정인가. 그저 부르주아 아녀자로서 굳이 나의 계층을 위한 변명을 해보자면 꼭 많이 낳아야 위대한 모정은 아니라는 것일 뿐이다.

또 하나 뜨악했던 것은 마지막 9연이다. 뼈빠지게 일하고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부자 욕하지 않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폐 안 끼치고 불법 안 저지르는 사람을 축복하라는 것은, 즉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잘못된 법을 고치자고 하며, 거리에서 데모하는 일꾼은 축복 대상에서 빠진다는 것인가?

물론 모든 걸 남 탓을 하고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안하면서 세상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는 피곤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은 일꾼이 아니라 그냥 밥버러지니까 축복받거나 말거나. 반면, 사회에 대해 불만이나 비판이 하나도 없이 사회는완전히 공평하니까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바보다. 사회는, 그리고 경제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다. 부자와 기업은 조직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데 중산층 이하는 응집과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아니 일부러 못하게 하니까 노동조건이 점점 열악해지고 삶은 피폐해지는 것 아닌가. 이 시 9연에서 이야기하는 착하고 얌전하고 말썽 안 부리는 밥벌이꾼은 아무리 정치와 법이 불공평해도, 노동력과 임금과 삶을 착취당해도 '그저 소박한 행복이 최고랑께~'를 외치는 '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1연의 다산모 내용을 보면 시인이 아마도 카톨릭 교도인 듯해서 더 연상이 되지만, 시를 보고 브라질의 대주교 헬데르 까마라 (발음 맞나?)가 한 말이 떠올랐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나더러 성인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가난을 순전히 개인적인 자선의 문제로 보고, 가난의 근본적 원인을 해소하는 사회적 개혁을 논하는 것은 터부시하는 빈곤의 낭만화는 결국 교회와 권력의 결탁 아닐까?

적선도, 성금도 좋고, 무료급식소도 좋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선의를 어떻게 삐딱하게만 볼 수 있겠나. 개선과 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실업자 신세에도 매달 후원금을 내고 있다. 하지만 자선이나 감사하게 받고, 혹은 뼈빠지는 일이나 열심히 하고 영원히 가족 부양에도 허덕이며, 그저 부자 욕 말고 얌전히 있다가 가끔 눈시울 뜨거워지는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 가난한 이에게 주어진 몫의 전부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 성원으로서의 권리이자 의무를 다하려면 조직도 하고, 정치 참여도 하고, 불평과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안 착한' 일꾼이 될 필요도 분명히 있다. 물론 그렇다고 틈틈이 동리 구멍가게로 달려가 소주잔 기울이지 못할 이유도 없고.

나하고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축복하소서'의 시적 완성도나 노동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난을 접하면 감상에 빠졌다가도 비판의 가시를 세우게 되는, 완전히 우로도 완전히 좌로도 치우칠 수 없는 중도층 중산층의 자기모순인 거지 뭐.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천차만별로 살아가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게 사회 아닌가. 일용직 노동자에서 외과의사까지, 살림살이는 달라도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2010/11/04 10:54 2010/11/04 10:54
로키
tags : , ,
분류없음 2010/11/04 10:54

트랙백 주소 : http://lokasenna.pe.kr/blog/trackback/42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0/11/06 23:49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일이 마지막회던데.. 나도 요즘엔 거의 안보다가 오늘 모처럼 봤네.
    난 이제 좀 힘빼고 지내는편. 고민하던 부분도 그냥;; 소식이 좀 뜸했잖아 ㅎ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의식이 깨어있는 모습이 멋져보여 끄적이고 감!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 로키 2010/11/09 17:35  수정/삭제

      땡큐~ 고민이 덜하다니 다행이다 ㅎㅎ 난 오늘도 또 몇 편 정신없이 봐버린(..)

죽음을 위한 찬가

닐 게이먼 (Neil Gaiman)의 샌드맨 1권 (Sandman: Nocturnes and Preludes) 마지막편, '그녀의 날개소리'에서 본 후 계속 마음에 남았던 시이다. 죽음을 위한 찬가인데, 조금 찾아보니 고대 이집트 중기 왕국 때 작품이었다.1 인터넷에서 찾은 영문판을 나름 번역해본다.


Death is before me today:
Like the recovery of a sick man,
Like going forth into a garden after sickness

오늘 내 앞에 죽음이 있네
병자의 회복처럼
병 끝에 정원으로 나아가듯이.

Death is before me today:
Like the odor of myrrh,
Like sitting under a sail in a good wind.

오늘 내 앞에 죽음이 있네
몰약의 향내처럼
쾌적한 바람 속 돛 아래 앉은 듯이

Death is before me today:
Like the course of a stream
Like the return of a man from the war-galley to his house.

오늘 죽음이 내 앞에 있네
냇물의 흐름처럼
전함에서 집으로 귀환하듯이

Death is before me today:
Like the home that a man longs to see,
After years spent as a captive.

오늘 죽음이 내 앞에 있네
오랜 포로생활 동안
그리워한 고향과 같이.


산과 골짝의 연속인 생을 빠져나오면 평온한 바다처럼 탁 트인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한한 자비인가. 긴 하루를 끝내면 잠에 빠져드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도 고마운 일.


Footnote.
  1. Dispute Between a Man and His Ba, Miriam Lichtheim 번역 [Back]
2009/03/10 22:54 2009/03/10 22:54
로키
tags : ,
분류없음 2009/03/10 22:54

트랙백 주소 : http://lokasenna.pe.kr/blog/trackback/305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sdee 2009/03/11 01:12  수정/삭제  댓글쓰기

    [샌드맨] 한번 구해 봐야겠네요. +_+)/
    '승한 형 집에 갔을 때 빌려올걸!'도 싶지만, 여유나는 대로 구입해서 만화동아리 동방에라도 갖다둬야. ^^

  2. lhovamp 2009/03/12 13:05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공강에 빈둥거리다 학교 전산실에서 접속을 시도했는데, 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가 있었군요.

    '죽음을 미화시키는 포스팅이 올라오는 불온 사이트' 로 지명되어 블록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 로키 2009/03/13 11:56  수정/삭제

      나도 어제는 좀 접속이 안 되더니 오늘은 되네. 불온 사이트 지정이라 후덜덜(..)

농담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아침 신문에서 본 시 한 편을 옮겨본다. 왜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弄談이든 濃淡이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제목.
2008/11/08 14:25 2008/11/08 14:25
로키
tags :
분류없음 2008/11/08 14:25

트랙백 주소 : http://lokasenna.pe.kr/blog/trackback/273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한 번만 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한 번 만 더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변호사가 못 돼도, 장래가 없어도, 지금 가진 걸 다 내놓아도 좋아. 다시 뵙고 싶다, 너무나. 이게 슬픔의 셋째 단계, 거래인가. 모든 게 '엄마가 보고 싶은 나' '엄마가 없는 나의 삶' 생각이라니, 죽음에 대한 슬픔이란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지만 아무리 이기적이라도 아픈 건 사실이야. 삶에 너무나 깊이 파고든 나의 일부가 뜯겨나간 건 적응 과정이 필요해.

나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이순신 장군처럼! 얘기하고 돌아가신 엄마 마음도 그런 슬픔을 막아주려는 거셨겠지. 낮에 같이 얘기한 분 말로도 외국에서 공부하는 사람에게 안 알리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고도 하고. 내가 직접 여쭤봤을 때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한 아빠의 연기력은 정말 짱이었다. (개사기 신문으로 몰렸던 ㅇㅇ일보에는 나름 미안..(..))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게 마련이라네 훗훗..(?!)

난 대체 왜 외국으로 나온 걸까... 2년 반을 더 같이 보낼 수도 있었는데. 아니,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해도 엄마가 아프신 후에는 휴학할 수도 있었는데. 물론 엄마부터 시작해서 다들 반대했겠지. 엄마가 말기 암이셨던 건 나만 빼고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일찌감치 결혼이라도 했더라면 지금도 국내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손주를 안겨드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보고 싶어. 보고 싶어. 하지만 다시는 볼 수가 없어. 그것이 죽음의 최종성. 누구나 어떻게든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의 유한함. 칼릴 지브란이 말했듯 죽음은 삶의 중심에 있으니까. 이렇게 있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그저 지금은 아파하고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 웃고, 떠들고, 공부하고, 놀고, 글쓰고, 책보고, 생각하고, 울고. 그 모든 것은 그저 생활, 나의 하루. 그리고 잠들고, 그리고 죽고. 하지만 난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너희 기쁨은 너희 슬픔의 참 얼굴이니라.
너의 웃음이 떠오르는 우물은 종종 너의 눈물로 가득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슬픔이 존재를 깊이 파낼 수록 너는 더 많은 기쁨을 담으리니
포도주를 담은 잔은 도공의 아궁이에서 불로 구운 바로 그 잔이 아니며
음악으로 혼을 위안하는 류트는 칼로 비워낸 바로 그 나무가 아니더냐.
기쁠 때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너에게 슬픔을 준 바로 그것에 네가 기뻐함을 알게 되리라.
슬플 때 다시 마음을 들여다보면 기쁨 준 것을 위해 눈물 흘리고 있음을 깨달으리.

혹자는 슬픔보다 기쁨이 크다 하고 또 혹자는 슬픔이 크다 하나
말하노니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는지라.
둘은 함께 찾아오며, 하나가 너와 둘이 식탁에 앉으면 다른 하나는 네 침상에서 자고 있음을 기억하라.

진실로 너희는 슬픔과 기쁨 사이에 천칭처럼 걸려 있도다.
텅 비었을 때에만 움직임 없이 평형에 있으니
보물지기가 그의 금과 은을 재려고 너를 들어올릴 때면 너의 기쁨과 슬픔도 오르고 내리는지라.

죽음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너희가 죽음의 비밀을 구하나
삶의 중심이 아니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밤에만 보며 낮의 빛 속에 눈이 먼 올빼미는 빛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나니
죽음의 영을 보려고 한다면 삶의 육신에 마음을 활짝 열라.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이 삶과 죽음은 하나이나니.

희망과 욕망의 깊이 속에는 초월의 고요한 지식이 있으며
눈밭 밑에 꿈꾸는 씨앗처럼 너의 마음은 봄을 꿈꾸느니라.
그 꿈을 믿으라, 그 속에는 영원의 문이 숨어있으니.
죽음에 대한 너의 공포는 영예를 받으려고 왕 앞에 선 목동의 떨림과 같도다.
그 떨림 밑에 목동은 왕의 표식을 지닐 것을 기뻐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리하여 더욱 그 떨림을 의식하지 않는가?

죽는다는 것은 바람 속에 벌거벗고 햇빛 속에 녹아드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숨이 멎는다는 것은 숨결이 그 부단한 조수에서 놓여나 상승하고 확장하며 구속 없이 신을 찾는다는 것이 아니면 또 무엇인가?

침묵의 강물에서 마셔야 마침내 노래하게 되리.
산꼭대기에 도달해야 마침내 오르기 시작하리라.
대지가 너의 육신을 차지했을 때, 그때에야 진정 춤을 추리라.


..아아, 이제 한결 나아졌어. 늘 고마워요, 칼릴, 친구여, 고독한 눈빛의 예언자, 젊은 스승. 이제는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2008/04/05 16:07 2008/04/05 16:07
로키
tags : , ,
분류없음 2008/04/05 16:07

트랙백 주소 : http://lokasenna.pe.kr/blog/trackback/149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방문자 2008/04/06 17:15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Xenosia 2008/04/07 15:44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에서야 알게 됬습니다.
    말주변이 딸리다보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언제나 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계셨으면 좋겠네요.

    이 이상의 이야기는 블로그에 써뒀습니다.
    아직도 시간에 쫒기는 자신이
    오늘만큼 한심하게 느껴진적이 없네요 s( -_-)v-~@

Powerd by Textcube, designed by criuce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