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계의 전설 앨런 무어 (Alan Moore)가 글을 쓰고 데이빗 로이드 (David Lloyd)가 그린 만화 V for Vendetta (이하 내멋대로 번역인 '복수극의 V'라고 칭하겠다)는 영화판이 나올 때 알려졌듯 V라고 자칭하는 테러리스트가 주인공이다. 전체주의 정부에 맞서는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의 이야기는 반향과 논란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정치적 폭력에 정당화의 여지가 있는가, 테러리스트가 영웅일 수 있는가 등등.1
미어터지는 출근 지하철에 서서 읽기 시작해서 그럴까, 내가 이 책을 본 관점은 좀 달랐다. 정치적 의도의 폭력과 테러리즘에 대한 논의는 이미 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폭력의 문제 자체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지하철이라는 상황과 작품의 연관성이었다. 이곳, 왜 이 많은 사람이, 내가, 우리가 새벽부터 이 미어터지는 출근 전철을 메우고 있는가? 하는 새삼스런 놀라움.
'복수극의 V'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정치적 폭력의 문제일지 몰라도 그 출근 전철에서 나는 우리 사회, 특히 서울이라는 곳에 만연한 경제적 강제력을 실감했다. 우리들은 왜 새벽부터 고단한 몸을 이끌고 가축처럼 기차칸에 우글우글 몰려 인구 천만의 도시로 꾸역꾸역 몰려드는가? 개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거대하고 엄정한 경제적 논리가 우리들을 이 전철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왔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있으면 흔히 들 수 있는 생각이지만, 다들 똑같아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에, 문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쏟아지듯 몰려들어오는 지친 몸들이 순간 공포스러웠다. 마치 우리가 정말로 가축칸에 누군가 몰아넣은 짐승인 것처럼, 각자의 생각과 꿈과 욕구 같은 건 없이 몸으로서, 경제라는 기계를 돌리는 고기 톱니바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V에 나오는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이 개성은 아무래도 좋은 국가의 구성요소로서, 혹은 제거해야 할 방해물로서만 존재하듯이.
그때가 세 번째 중 처음 운 순간이었다. (미리니름)
그때 '복수극의 V'는 나를 처음 울렸다. 세 번 중 첫 번째였다. 책 속, 전체주의 국가가 된 영국의 잔혹한 경찰에게서 V는 열여섯 살 소녀 이비를 구해 아지트로 데려온다. 그는 이비에게 과거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지만, 이비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지하철에서 얼굴 없는 군중 중 하나가 되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나에게 그때 V의 대사는 정말 절절하게 와닿았다.
모든 사람은 특별해. 모든 사람이 말야. 모든 사람은 영웅이자, 연인이자, 바보이고, 악당이지. 모든 사람이 그래.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어. 이비 해몬드도 그럴 거고. 난 이비 해몬드의 이야기를 무척이나 듣고 싶군.
출근길 서울 지하철이라는 그 시간, 그 공간 때문이었을까.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여기 있는 모든 이가 그렇구나. 내 마음 속에서 순간 나 자신을 포함해 가축 수준으로 떨어졌던, 국가와 경제의 기계를 돌리는 하잘것없는 부품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이들이 실은 그렇게 특별하구나. 이 많은 사람이 다. 그것이 곧 희망일지도, 그리고 동시에 가장 두려운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눈물은 오후에 책을 이어서 읽는 동안 찾아왔다. 모든 품위와 권리를 빼앗기고 짐승처럼 감금당한 이비에게 전달한 발레리의 편지는 누구에게나 양보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 혹은 자존심, 그 마지막 한 치2를 이야기한다. 잃어버려도, 팔아도, 줘버려도 안 되는 그 마지막 한 치는 보잘것없고 연약하지만, 한없이 약하고 무력한 인간이 어떤 억압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조그마한 한 치는 그래서 세상의 어떤 힘보다도 거대하고 강하다.
한 치. 작고 연약하지만,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죠. 잃어버려서도, 팔아서도, 줘버려서도 안 돼요.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돼요. - 발레리의 편지 중 (책이 없어서 자체 번역)
휴지 다섯 장에 쓴 그 편지, 잔악한 폭력에 희생당한 한 용감한 여인의 글을 읽고 또 읽은 이비는 끝내 자신의 마지막 한 치인 정직성과 용기를 포기하기 거부한다. 고문을 당하고서도, 총살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V를 거짓 고발하는 자백서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마지막 한 치를 지키는 순간 그녀는 자유로워진다. 그 모든 것이 V의 광기어린 연극이었다 하더라도 그 허구는 얼마나 진실한가. '복수극의 V'라는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광기어린 허구이지만 동시에 크나큰 진실을 품고 있듯이. (다만 이비가 너무 불쌍하긴 했다(...))
세 번째 나를 울린 대목은 형사 에릭 핀치가 라크힐 강제수용소 자리였던 폐허에서 환각제에 취해서 본 환상이었다. 여기서도 앨런 무어는 허구의 강력함과 진실성이라는 주제를 교묘하게 배치한다. V가 이비를 위해 만든 압제와 해방의 연극이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듯이, 핀치에게도 현실을 마주해온 수십 년보다 LSD의 환각이 강렬한 통찰력과 자유를 선사한다.
LSD를 먹고 핀치는 전체주의 정권의 잔악을 통해 스러져간 흑인, 아시아인, 동성애자들을 환각 속에서 본다. 그들이 그에게 웃어주고, 끌어안고, 인사하고 마침내 사라져가는 것을. 그 한없이 진실한 환상 속에서 그는 노스파이어가 그들을 말살한 이유인 그들의 다름--피부가 검다는 것, 외국인이라는 것,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했는지, 개개인의 특성과 특이점이 얼마나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는지 새삼 깨닫고 사무치는 회한에 흐느낀다.
사람이 제각기 서로 다르다는 것은 때로는 얼마나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가. 저 사람은 피부가 검어서 무섭고, 저 사람은 이슬람교도라서 무섭고, 쟤는 혼혈이라서 싫고, 저 사람은 동성과 사랑하다니 이상하고, 저 여자는 뚱뚱하고 못생겨서 보기싫고, 결혼도 안한 여자가 아이를 낳다니 부도덕하고...
그런 위협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사회적 폭력이 작용한다. 이상하게 본다든지, 수근거린다든지, 욕한다든지, 해고한다든지, 죽인다든지. 이러한 사회적 폭력 중 극단적인 형태는 책에 나오는 노스파이어가, 그리고 현실의 나치정권이 그랬듯 대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말살하는 것이다.
핀치가 환각 속에서 본 진실은 그러한 다양성의 말살이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과 풍요를 우리에게서, 사회에게서 빼앗아가는지 하는 깨달음이다. 국가폭력이니 인권이니 하는 생각을 접어둔다 하더라도, 우리와 다른 외모, 문화, 생각, 생활방식은 종종 흥미진진하고 아름답다. 두려움과 낯섦을 한 꺼풀 벗겨내면 검거나 희거나 갈색인 피부의 다양성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나와 다른 생활과 생각에서 배울 것은 얼마나 많은가. 언제나 문제와 갈등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다양성 자체가 사라져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비루하고 빈약해질까. 나를 나답게, 당신을 당신답게 하는 것, 우리가 다른 점은 그래서 수치스럽거나 문제거리가 아닌 우리들의 공동재산, 우리 삶을 그만큼 풍성하게 하는 다양성이다.
가축 우리처럼 붐비는 출근 전철에서 읽기 시작한 '복수극의 V'라는 작품은 그래서 내게 개개인의 존엄성과 특별함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테러 그 자체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 V가 전체주의 국가에 대항해 정치적 동기의 폭력을 행사하는 근본적인 이유인 개개인의 가치가 내게는 크게 와닿았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 싸우는 V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지만, 다르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개인성을 대외적으로 숨김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어느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이 되니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고 싶다는, 부품이나 희생양이 아닌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존중받고 싶다는 모든 인간의 염원의 표현이,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한 투쟁이 바로 V의 진짜 정체이며 의미이다.
Footnote.
사실 누군가의 테러리스트가 다른 사람의 영웅이라는 건 이미 다들 잘 아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의사'라고 하는 안중근, 윤봉길 의사만 봐도--어렸을 때 로키는 이분들이 의사선생님인 줄 알았지만--객관적으로는 테러리스트 아닌가. 다만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를 표적으로 하는 폭력은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표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정당화의 여지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Back]
the last inch - 번역본은 '마지막 부분'이라고 하지만 알아먹기 어려워서 '한 치'라고 하겠다 [Back]
오늘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1, 2권을 선물받았는데, 꽤나 재밌게 봤다. 세련된 팝을 하러 도쿄에 상경했건만 정작 데스메탈 밴드의 악마적 보컬로서 성가를 올려가는 가련한 청년 네기시 소이치가 주인공인 이 만화는 밴드 활동과 관련해 일어나는 황당한 사건들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를 보고 웃으면서 데스 메탈과 일탈적 매체에 대해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데스 메탈의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가사와 공연 내용을 문제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보고 들으면 애들이 어떻게 된다 하는 소리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않았을 때나 할 수 있는 얘기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사람이라면 말끝마다 살해와 겁탈을 외쳐대는 가사는 억압적인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며,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물론 그런 내용의 노래를 듣고, 공연을 보고 모방범죄를 저지르는 사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다. 연쇄살인하라는 내용이 노래가사에 나왔다고 그걸 따라하는 바보가 있다면, 애당초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본다. 그런 노래를 금지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은 오류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도덕성이나 현실 감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데스메탈이 아니더라도 어떤 계기로든 범죄를 저지른다고 본다. 데스메탈을 듣는 절대 다수의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그 일탈을 확고히 환상의 영역에 남겨둔다. 결국 같은 매체에 대한 전혀 다른 반응은 사람에 달린 것이지, 매체의 내용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처럼 안 들으면 그만이지 굳이 딴지를 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에서 그 현실과 환상의 경계와 긴장은 웃음을 선사한다. 고 투 DMC를 외치며 환호하는 팬이든, 겁탈과 살해를 외쳐대는 가사를 작사하고 노래를 부르는 네기시든 현실에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환상이 현실에 침범하면서 말랑말랑한 팝송을 좋아하는 마음씨 착한 이 시골청년은 종종 어처구니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사건을 겪으면서 네기시는 자신도 모르게 클라우저 II세의 광기어린 언행을 그대로 재현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가 사건을 수습하려고 부득이 무대 외에서도 클라우저 II세 역할을 하면서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전설은 커져만 간다. 번번히 네기시는 클라우저 II세로서 한 행동을 후회하면서 이런 밴드따위 하기 싫다고 되뇌이지만, 정작 그가 하고 싶어하는 부드러운 발라드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그는 재능을 펼칠 수 있는 DMC로 매번 돌아온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보면 네기시도 자신의 재능과 DMC의 음악에 훨씬 자부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음악이 팬들에게 일상에서 생긴 스트레스의 분출구가 되는 환상 속의 일탈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그리고 클라우저 II세의 영역 역시 환상에 제한시키면 엉뚱한 때에 나타나 네기시의 현실을 침범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된다면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유쾌한 소재는 한결 줄어버릴 지도 모르지만.
아래는 보너스로 멋진(?) 공연 동영상 하나. 호주의 코미디 프로 체이서 (The Chaser)에서 데스 메탈 밴드 캐니벌 콥스 (Cannibal Corpse)의 음악을 라운지 음악으로 편곡한 것이다. 위에서 한 얘기처럼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논객들에 대한 풍자도 있어서 더욱 재밌다.
Now, as a lounge singer, I'm extremely disappointed that politicians want to ban the tour of death metal group Cannibal Corpse on account of the lyrics being too violent. But I disagree. Take a look at them. (Cannibal Corpse clip) The lyrics aren't the problem, it's the music. (Laughter) So in case they can't tour, I've created a lounge music arrangement using the actual words to the Cannibal Corpse song, "Rancid Amputation."
라운지 가수로서 저는 일부 정치가들이 데스 메탈 그룹 캐니벌 콥스의 순회공연을 금지하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실망입니다. 가사가 폭력적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한 번 보시죠. (뮤직 비디오 일부) 가사가 문제가 아니라 음악이 문제인 거죠. (관중 웃음) 따라서 혹시 순회공연을 못할 경우에 대비해 그들의 곡 "역겨운 절단" 가사를 라운지 음악으로 어레인지했습니다.
Rippin' through flesh is what I do best Tear off an arm, amputate a neck Eyes removed, cranium smashed Decomposing remains severed in half
살을 찢는 것이야말로 나의 재능 팔을 뜯어내고 목을 절단한다 눈을 꺼내고 두개골을 박살내지 썩어가는 시체는 반으로 갈라
Torsos hang from their own intestines Ripped off all bodily extensions Stumps writhing with infection Suffering a rancid amputation
Dyin' slowly never to rest Nerves are quivering as I rip Removal of life on the blade of my knife (And now for my favorite Cannibal Corpse lyric of all) Rape the limbless cadaver.
천천히 죽어가며 안식도 없구나 찢어내면서 신경이 부르르 떨려 나의 칼날로 생명을 베어내고 (그리고 다음이 제가 최고로 꼽는 캐니벌 콥스 가사죠) 사지 없는 시체를 강간한다
앤드류 한센 쵝오. ㅡㅡd 왠지 네기시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서 안습이랄까. 실제로 발라드를 홧김에 데스 메탈로 바꿔버린 일도 있었으니. 어쨌든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추천!
꿈이란 무엇일까. 현실과 환상, 억눌린 욕망의 총체, 밤마다 죽는 작은 죽음의 혼란스러운 사후세계, 아침 햇살이 비치면 스러지는 허깨비... 꿈은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하며, 실체가 없고, 쓸모도 없다. 숨막히게 돌아가는 냉엄한 현실 속에 꿈만큼 무용한 것이 어디 있을까?
샌드맨은 그런 꿈의 화신이 주인공인 만화 시리즈다. 그는 삶의 여러 측면을 상징하고 관할하는 일곱 영원 (The Endless) 중 하나로서 꿈결의 군주이다. 그와 죽음, 욕망, 분열 등 형제들은 인간사에 드나들며 때로 간섭하고, 때로 관조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정말이지 다양한 인간 군상과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샌드맨의 재미다.
샌드맨 5권 '너라는 게임 (A Game of You1)'과 6권 '우화들 (Fables & Reflections)'은 어떻게 보면 샌드맨 시리즈가 다 그렇듯 꿈과 현실이 맞닿는 경계 이야기다. 그리고 이 경계에서 꿈은 무익한 허깨비 이상의 위력을 보인다. 아니면 현실도 꿈만큼 연약한 허깨비여서 그런 것일까.
5권이 현실을 위협하는 꿈 이야기라면 6권에 나오는 단편들은 뭔가 하나씩 꿈을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꿈은 첫 단편인 '세 번의 9월과 한 번의 1월'에서처럼 어리석고 허황된 것일 수도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노튼 1세는 실존 인물로, 19세기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었다. 미국 황제를 자칭하는 그를 보고 비웃을 수도, 재미있어할 수도, 동정할 수도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예우해주는 모습에서 나는 어떤 위대함을 느꼈다.
광기는 신성하다고 했던가.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자신의 꿈에 그렇게까지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들 주변과 사회에 적당히 맞추어 살아가지, 자신의 법칙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조소와 구설수의 대상이 되기 쉽고, 심지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자기 꿈을 계속해서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있고, 그런 사람은 이상하고 사회화가 덜 된 사람이지만 동시에 경이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도 한다.
"광기가... 광기 덕분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어."
- 꿈의 여동생 분열 ('세 번의 9월과 한 번의 1월' 中)
꿈은 개인적이고 내밀하며, 연약하고 덧없는 허깨비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혼의 반향이기도 하며, 사람을 자신답게 하는 모든 것의 총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꿈을 꽁꽁 감추고 보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친 세상에 상처받지 않게, 아침의 무자비한 햇살에 녹아 없어지지 않도록.
하지만 때로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내 꿈대로 현실이 따라야 한다고, 내 꿈이 옳다고 뻔뻔하게 주장하는. 아무도 사려고 들지 않는 대본을 수십 군데째 보내는 대본가이든, 다들 돈이 안 된다고 하는 사업에 돈을 쏟아붓는 사업가이든, 미합중국의 황제를 자칭하는 남자이든. 그들을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지만, 그들이 굴하지 않을 수록 그 꿈은 현실에도 반향을 일으킨다. 그리고 현실의 일부라도 이들 미치광이의 꿈에 물들어 간다. 그러지 못하고 그들은 비참하게 파멸해갈 수도 있지만, 그 파멸조차 꿈의 증거로 남겠지.
꿈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냉엄한 현실 앞에서는 사랑도, 예술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광기로서, 이런 것은 적당히 감추고 억누르며 살아가야 제대로 사회화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화들'에는 잘 사회화되지 않은 인물들이 뻔뻔스럽게 현실을 꿈의 색채로 칠하려 든다. 사랑의 신화를 쫓아 죽음의 경계를 넘고 ('오르페우스의 노래'), 초상화의 주인공을 쫓아 모험을 떠나기도 하고 ('사냥'), 영원을 위해 현재를 버리기도 한다 ('라마단').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꿈은 우리의 현실이 되고, 때로는 우리 꿈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냉엄하고 무자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꿈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당신에게서, 나에게서 시작한다. 그래서 연약하고 덧없는 개개인의 꿈이란 현실이라는 또 다른 꿈의 시작이기도 하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거대한 국가 조직에 '국가 차원의 제재'는 불가피한 요소긴 합니다만,
V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지는 그 제재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V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예, 그래서 V가 일방적인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거겠죠.
국가의 목적을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한다면 국가가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면 저항의 권리도 있는 것이니까요.
저도 폭력 외에 저항의 여지가 없다면 폭력도 정당화된다고 생각합니다. 넬슨 만델라도 그런 말을 했었고요. (그 양반 2008년에야 미국 테러리스트 목록에서 지워지기 핸지만(..))
물론 정상적인 정치 참여의 여지가 있는 사회에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