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논쟁이라는 것은 별 쓸데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논쟁에서 이긴(..) 적이 두어 번 있다. 정확히는 긴 논쟁 끝에 상대가 더 이상 댓글을 안 달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지. 상황이나 어조는 전혀 달랐지만 공통 원리는 있어서 나름 일반화할 수 있긴 하다.
방법? 방법은 간단하다.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면서도 상대를 긍정하는 것. 즉, 사안과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다.
예시 1: 유튜브에서 있었던 일. (두 논쟁 다 유튜브 비디오 댓글상이었다. 누가 내 글에 답변하면 이메일 알림이 와서 긴 논쟁이 벌어지기 딱 좋다.) 존 맥케인 패러디 비디오였는데, 그 댓글상에 어쩌다 낙태에 대해서 R이라는 사람과 논쟁이 벌어졌었다. 난 낙태의 자유에 찬성하는 쪽, 상대는 반대하는 쪽. 이게 얼마나 감정적인 사안인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R: 로키 당신은 귀에 옷걸이를 꽂고 태어났을지 몰라도 (로키 주: 이게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낙태를 광적으로 찬성하는 인간이라는 소리? 낙태하려다 실패해서 태어났다는 얘기? 모욕을 하려면 헷갈리게라도 하지 마 제발.) 인간이라면 자신이나 아기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려는 인간들은 다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한다. (로키 주: 음, 그래서 낳기 싫은 아이는 정신병원에서 억지로 낳게 하고? 와 멋진 신세계~) 입양만이 방법이다. (로키 주: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래서 국가에서 강제해야 하는 거구나~ 자기들 편리할 때만 국가 통제를 바라는 극우 보수주의는 멋지지. 그렇게까지 일관성이 없이 살면 얼마나 편해.) 경찰서나 소방서에 아이를 버리고 가도 아무 지장 없는데 어떻게 애를 죽일 수가 있냐. (로키 주: 유기죄라고 들어봤냐? 그런 법을 제정한 주도 있지만 주마다 법이 다른 걸 알기나 하나 몰라.) 불편하거나 심지어 살찌는 게 싫어서 애를 떼는 무책임한 여자들이 문제다. (로키 주: 역시 당신 사는 세상은 참 편한 것 같다. 수많은 여자들의 가슴아픈 사연을 그런 식으로 일축할 수 있으면 얼마나 속편할까.)
뭐 보다시피 난 좀 불만이 많은 발언이었지만 배울 기회로도 삼을 겸 꾹 참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논쟁을 시작했다. 나도 낙태는 없으면 없을 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모의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서도 같게 생각하느냐, 낙태는 되도록 없어야 하지만 국가에서 강제하는 것은 방법이 틀렸고 낙태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등등. 논리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뿔이 난 R씨,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겠다.
R: '어차피 낙태하는 X들은 대부분 헤프고 술취한 10대X들이다. 죽어도 싸다.'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인데, 어쨌든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피가 거꾸로 돌은 건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을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아니 죽고 싶을 정도로 모욕해줄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잠시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극우 찌질이가 지껄이는 소리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감정을 낭비해야 하지? 브루스 스털링 (Bruce Sterling) 등이 쓴 '어려운 대화' (Difficult Conversations)라는 책을 읽었던 나는 R의 저런 말들이 내 자아 정체성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R은 나더러 유아 살해를 지지하는 비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여성 생명의 가치조차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따라서 난 그의 공격 앞에서 내 정체성을 지키려고 그를 역으로 공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정치적 논쟁,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가 이런 식인지!
그리고 역시 '어려운 대화'에 나온 내용을 생각하며 R의 관점과 R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R과 나는 자라온 환경과 경험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전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R은 낙태를 줄일 수도 없는 억압적이고 위험한 국가정책을 주장하고 있지만, R은 태아가, 아기가 죽어가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슬픈 거다. 그리고 그런 것을 합법이라고 하는 국가정책은 부도덕하다고 느끼고, 그런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기 정체성에 얼마든지 위협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 생명의 가치가 평가절하당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그 고통에 대응해 방어적 공격성으로 나를, 그리고 낙태를 하는 여성을 마음 속에 악으로 추상화해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우선 나의 정체성은 R의 언행과 무관하므로 R의 행동에 내가 흥분을 하거나 위협받을 필요도 없었고, R의 동기에 대해 생각해 보니 그와 여전히 의견은 달랐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을 할 수도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을 썼다.
로키: R님 댓글은 잘 보았습니다. 합법적으로 죽어가는 태아에 대한 R님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크면 그렇게 공격적인 글을 썼겠어요. 통계에 따르면 낙태시술을 받는 여성 중 10대의 비율은 17%로서 R님의 얘기처럼 대부분은 아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이미 말했듯 저도 낙태는 적을 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나 국가의 강제는 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R은 이후 침묵했다. 무엇보다 그의 찌질한 글의 도착을 알리는 이메일이 더 이상 없는 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로 내 글을 본 그의 생각이 어땠을까 궁금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를 근본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 사안에 대해서는 반목하지만 사람으로서는 긍정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글을 더 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을 못 느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R은 아마 앞으로도 낙태 합법화 폐지를 주장할 것이다. 그건 또 그것대로 좋다. 낙태의 부작용에 대한 환기는 늘 필요하고, 관점의 다양성도 필요하니까. 모든 사람이 나와 의견이 같은 세상이란 얼마나 따분한가. 하지만 그 사안과는 별개로 좋은 사람이라는 긍정을 반대편에게 받았다는 점이 자아 정체성에 대한 R의 위협감을 좀 줄였기를 바란다. 자아 정체성을 방어할 필요를 덜 느끼는 만큼, 즉 두려움이 줄은 만큼 그는 상대편을 덜 공격하고, 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낙태의 자유를 찬성하는 사람 중에도 자신을 긍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낙태 자유 찬성론자에 대한 R의 고정관념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면 그는 의견이 다른 사람과 좀 더 건설적으로 이야기하고 협력할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럴 수 없다면 그런 그의 미숙함이 안타깝지만, 역시 그의 미숙함은 그의 의견만큼이나 나에게는 아무 위협이 없다.
사안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하면서도 얼마든지 상대방과는 예의바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사안과 사람을 분리하면 그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분리가 안 되는 사람에게는 그 분리를 몸소 보여주면 상대도 깨달을 수 있다.
예시 2: 이번 논쟁은 논조나 말투는 사뭇 달랐지만 원리는 같다. 미국 상원의 테드 케네디 의원 (JFK의 동생이며 '진보의 사자'라고 하는 민주당 의원)이 뇌종양 판정을 받고 입원했을 때였다. 케네디 의원 관련 비디오에 댓글을 달았더니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G: 케네디는 부와 지위를 이용해 살인을 은폐한 놈이다. 장례식에서 보자고!
역시 피가 거꾸로 도는 순간이었다. 로키의 대응은 빨랐다. (시간상으로는 예시 1보다 이전이어서 인격 수양이 덜 됐었나보다.)
신이 났는지 G는 케네디 의원에 대한 의혹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역시 이때도 생각을 했다. 수십 년 전, 젊은 여성의 죽음과 관련해서 케네디 의원에 대한 의혹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점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특히 케네디 의원이 눈엣가시인 우익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공인인 만큼 그런 점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좌이든 우든, 누가 됐건간에 '장례식에서 보자' 하는 식으로 병든 노인에 대해 고소해하는 것은 인간의 도를 넘어선 일이다. 그래서 다시 댓글을 썼다.
로키: G 당신 말대로 케네디 의원의 전적에 대해 의문을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 두 형을 연달아 잃은 그 시절에 그가 어떤 일을 겪고 또 했는지는 정당한 공적 사안이다. 그렇다고 그가 위독한 순간에 노인의 죽음을 바란다고? 다시 말하지. 꺼져, 이 찌질한 새X야.
G는 내 글에 다시 댓글을 달지 않았다. 그가 제기하는 의문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준 것으로 그는 아마 긍정받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는 케네디처럼 의혹이 있는 인물이 존경받는 사회적 인사이며, 특히 병 때문에 갑자기 좌우를 막론하고 위로와 찬사를 받는 상황이 참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G가 생각하기에 그 불의는 그의 자아 정체성을 건드렸기에 그는 그런 도가 넘는 글을 달았을 것이다. 그 의문의 정당성을 인정받자 좀 욕을 먹어도 물러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반론의 여지 없이 지나친 말이었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겠지만, 위협감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미처 할 수 없는 생각이었겠지.
두려움이란 이래서 무섭다. 그 두려움을 자극하는 대신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라도 사람을 긍정해서 두려움에서 이끌어내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다시 정상적인 사고를 되찾을 수 있으며, 피차 소모적인 논쟁이 길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게 내가 인터넷 논쟁에서 '이긴' 예이다. 하잘것없는 사건들이었지만 확실히 뭔가 배우긴 했다.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별 소리를, 때로는 별 짓을 다 한다는 것을. 역시 요다옹 말씀마따나 두려움은 다크포스의 근원인 것이다. 자신을 부정당하는 두려움에서 한 발짝 벗어나 사안과 사람을 분리해서, 사안에 대해서는 반대하되 사람은 긍정해 준다면 상대 역시 그 두려움에서 구제해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서로 이성을 찾고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인터넷 토론은 더 이상 쓰잘데기 없는 짓이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
트랙백 주소 : http://lokasenna.pe.kr/blog/trackback/303
댓글을 달아 주세요
-_- 나도 천주교지만 이런거 보면 진짜 병맛이다 싶어
신앙은 순수한 신앙인이 대다수이되, 뭐든지 권력조직이 되면 폐해가 생기는 듯. 보수화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