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승한군에게 빌린, 테드 창의 중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를 어제 읽었다. 기본적으로 생각 실험을 근간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SF 장르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 작품집이 아닌가 싶다. 과학적 사고와 소설적 표현이 함께 어우러진 '생각 소설'의 재미는 SF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이해'와 '네 인생의 이야기' 등에서 드러난, 생각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한 언어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보면 창의 작품을 SF를 넘어 메타SF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한편 작품을 쓰느라 언어학 책만 수십 권 읽었다는 얘기를 보면 왜 창이 다작하는 작가가 될 수 없는지 납득이 가면서도 그 장인 정신이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SF가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라면 사유 실험에 편중한 나머지 소설적 표현을 놓치는 것이다. 마이클 크라이턴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이 매니아에게 재미있기는 하지만 플롯 중심적이고 인물의 내면 표현이 부족해서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반면 테드 창의 작품들은 과학적 사고의 기반이 철저하면서도 인물의 감정이나 관계 표현에 상당히 충실한 점이 돋보인다. 뉴 웨이브의 영향이 어쩌고 할 것도 없이 그의 작품은 SF와 주류 문학의 경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경계를 모든 작품에 대해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학적 가치만을 따질 수 있고 장르 내적 맥락과 기준으로만 가치가 있는 책들도 분명히 많이 있으니까. 고전 추리소설의 퍼즐적 정형성, 로맨스의 흔한 전개, 판타지 검과 마법물의 천편일률적 줄거리, 그리고 공상과학의 줄거리 중심성 등을 문학의 심미적 가치와는 별개의 효용이 있는 장치로 본다면 이들 작품을 무조건 주류 문학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테드 창의 작품은 그런 구분 없이 소위 주류의 기준으로 평가해도 독자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상깊은 작품집 중에도 '네 인생의 이야기'가 제일 인상깊었다. 외계인과의 첫 접촉이라는 흔한 소재를 사용해 언어, 시간 관념, 그리고 사람이 생을 '경험'하는 방법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끝에 찡한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글에서 테드 창은 장르의 정형성을 알고, 이해하고, 비틀어서 장르의 본질을 표현하면서도 소설이라는 매체의 미적 가치를 놓치지 않는 솜씨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펼치고 있다.

이렇듯 존재의 조건 자체에 도전하는 사유 실험에--수학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면? 시간을 순차적인 아닌 동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면?--차가운 지적 거리를 두지 않고 인간적 공감을 통해--끝나가는 결혼생활의 조용한 절박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절절한 슴픔--바로 '나'의 이야기로 느끼게 하고, 그럼으로써 삶 자체를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하는 것은 사유 실험과 소설을 결합한 SF가 선사할 수 있는 재미의 극치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SF를 통해 엿보는 새로운 가능성들의 희열과 두려움은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08/12/02 17:01 2008/12/02 17:01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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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haya 2008/12/03 10:09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해 초에 드디어 하나 더 쓰셨는데.. 왠지 당연한 듯 휴고상이랑 네뷸러상을 다 받아버려서 '상받는 게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아버렸다죠.

    최신 SF 작가군 중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라 생각합니다. 테드 창 만세!! -_-b

    • 로키 2008/12/03 16:40  수정/삭제

      정말 대단한 작가죠. 꼭 글쓰기에 생계를 의지하고 풀타임으로 뛰어야 뛰어난 작가는 아니라는 산 증거인 듯도!

  2. Wishsong 2008/12/03 14:55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게도, 난 그 사유 실험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어; 좀 더 읽어보고 맛을 되새겨야 할 것 같아.

    그래도 지금까지 이해한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독서였음.

    • 로키 2008/12/03 16:41  수정/삭제

      내일 돌려줄게. :) 이 책에 대해서는 승한군하고도 좀 더 얘기해보고 싶어.

  3. lainavi 2008/12/11 09:54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자꾸 읽고 싶은 책을 늘리지 말아줘

    • 로키 2008/12/11 16:24  수정/삭제

      뭐 네가 소설 읽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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