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은 정치적이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면 이란인 영문학 교수이며 작가인 아자르 나피시 (Azar Nafisi)의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Reading Lolita in Tehran)'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미국에서 공부하다 이란에 귀국한 필자가 이란 혁명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많은 억압을 겪다 결국 대학을 때려치우고 가장 가까운 학생들과 목요일마다 집에서 영문학 토론 강의를 열었던 얘기. 나보코브의 롤리타, 오스텐의 오만과 편견,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 등, 부도덕하다고 혁명 정권이 금지한 책들을 읽고 토론하고 고민하는 이들 여성의 모습은 문학과 삶, 그리고 정치와 개인에 대한 감각적인 통찰이다.

책에서 나피시가 하는 얘기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상상력의 정치성이다. 이란 혁명은,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은 현실의 싸움일 뿐 아니라 상상의 싸움이기도 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책 첫머리에서 그녀는 다시 이란을 떠나며 학생들과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언급한다. 첫 번째 사진의, 법적으로 강제당한 베일과 로브를 똑같이 두른 그들은 이란 혁명 정부가 상상하는 고분고분한 이슬람 여성. 자신이 아닌 타인의 상상의 일부가 된 모습이다. 두 번째 사진에서, 집안이니까 로브를 벗고 그 밑에 청바지, 치마 등 스스로 고른 옷을 드러낸 그들은 제각기 개성대로 구분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그것이 그들이 상상하는 자신들의 모습이다. 서로 다른 취향과, 꿈과, 믿음이 있는 개체로서.

개인적 상상력과 개인적 표현은 모든 억압적인 정권에 위험하다. 그래서 혁명 정부는 언론과 집회뿐 아니라 복장을, 문학을, 예술을 규제하며 이란 국민의 공적, 사적 생활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 국민이 자신들의 상상,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없도록. 그들의 이야기와 상상과 꿈조차 지배하고자. 독재 정권의 수법이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이란이나 우리나라의 군부 정권은 사실 좀 촌스러운 옛날식 독재에 속하고, 요즘의 신자유주의 세계에는 직접적인 억압 대신 극도의 상업성과 개인주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해서 소수의 통치로 가는 방향인 것 같지만, 어느 쪽이든--통제이든, 매체의 홍수이든--상상력을 지배하지 않고는 진정 지배할 수 없다.

열두 살 롤리타를 차지한 험버트 험버트는 행동의 자유만을 제약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 자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험버트가 롤리타라는 이름을 붙인 아이의 관점을 독자는 영영 알 수 없다. 오직 험버트의 시선을 통해, 험버트가 10대의 돌로레스를 부수고 자기 뜻대로 만들어낸 롤리타만을 볼 수 있으니까. 롤리타는 자신의 이야기조차 끝내 할 수 없이 험버트의 상상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은 육체의 죽음과는 또 다른 기억의 죽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상상이 죽으면 육체의 죽음 후에 뭐가 있는가?

험버트가 악당인 근본적인 이유는 호기심의 결여라고 나피시와 학생들은 결론을 내린다. 그는 타인에 대해, 심지어 끝없는 집착과 번뇌의 대상이었던 롤리타에 대해서도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직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만족. 그래서 롤리타를 포함해 다른 사람이란 그에게 진정한 개체가 아니라 수단이나 방해물이나 지나가는 인상일 뿐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느냐고,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꿈꾸느냐고 묻지 않고 그를 위할 수는 없다. 상대의 의지를 상관하지 않으면 섹스가 강간이 되듯.

호기심의 결여가 악이라면 그에 대한 처방은 대화이겠지. 그런 면에서 나피시가 얘기하는 소설의 근본적 민주성은 더욱 흥미롭다. 오스텐의 '오만과 편견'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목소리들, 대화와 수다와 편지의 시끄러움 속에서 독자는 인물들의 입장을, 그들의 두려움을, 희망을, 관점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잘 쓴 소설은 가르침이나 설교가 아닌 이해와 경험이다. 탐욕의 함정에 대한 소리높은 웅변이 아닌, 부두 끝의 녹색 빛을 향해 달려가는 소년의 꿈이 '위대한 개츠비'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와 상상에 들어가본 독자는 또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하며 새로운 의미의 화음이나 불협화음을 만들어간다.

그 수많은 목소리의 불협화음 대신 대신 단일하고 강한 목소리를, 거대한 화합의 합창을 바라는 것도 물론 자연스럽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티투스 리비우스를 논하며 지적했듯 (1권 4장 (영문)) 정쟁은 좋은 정치적 결정의 기반이며, 폭력으로 폭발할 수 있는 이해 충돌의 압력을 완화하는 압력 밸브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눈 먼 채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과 집단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침묵을 강요한 정치적 결정 과정은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달려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극우에서는 종종 반대하고 논쟁하며 드높인 목소리를 한가로운 이기주의로 치부하지만 (그러면서 자신들의 반대와 논쟁에는 묘하게 관대하지), 대화와 논쟁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삶과 존재의 근본이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나의 상상은 묻히고, 나의 존재는 잊혀져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이 될 테니. 나의 염원이, 나의 이익이 드러날 장이 봉쇄당한다면 남는 선택은 굴종 아니면 폭력이다. 그리고 굴종 속에는 언제나 폭력의 씨앗이 독초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가 상상력을 지배하려고 드는 이유는 상상력의 위험성 때문이다. 상상은 개인적이며, 개인주의적이며, 불온하다. 법과 폭력으로 강요당하는 베일과 로브 밑에 입은 각양각색의 청바지와 치마와 티셔츠와 블라우스처럼, 상상의 영역 속에서 사람은 무엄하게도 독재자의 꿈이 아닌 자신만의 꿈을 꾼다. 자유롭게 내는 목소리를 통해 이 상상은 공적 영역으로 터져나오며, 사회는 통제할 수 없어져버린다. 결국 근본주의의 진짜 적은 내가 나이며,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 그 자체. 우리들이 제각기 하는 상상과 꾸는 꿈은, 우리가 내는 목소리의 시끄러운 불협화음은 그래서 민주적이며, 또한 정치적이다.
2008/03/24 23:50 2008/03/24 23:50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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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08/03/24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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