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인간

이번에 시험을 보느라 한 지출 중 하나는 손목시계를 산 것이다. 걸리적거리는 걸 싫어하기도 해서 손목시계 안 찬지 몇 년 됐는데, 시험장에는 전자시계나 핸드폰은 허용이 안 돼서 아날로그 시계를 하나 사기로 했다.

마침 집 근처 편의점에는 구석에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쓴 시계 진열장이 있다. 그 진열장을 좀 뒤지다가 괜찮은 시계를 발견했다. 은빛 팔찌형 시계줄에 분홍색, 연청색, 연두색, 보라색의 알록달록한 돌이 박혀서 특이하면서도 비교적 점잖다. 값은 15불, 계산대에 가져오니까 여자 점원이 탐냈을 정도.

흐뭇해하면서 집에 와서 영수증을 보고 가계부를 적는데 액수가 너무 적었다. 시계하고 같이 산 펜하고 수정 테이프밖에는 영수증에 나오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계좌를 확인해봐도 그 액수밖에는 인출이 안 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계산이 안 된 건가, 혹시 그거 계산해준 점원 봉급에서 까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시계를 차고(..) 영수증과 시계가 들어있던 케이스 들고 편의점에 다시 가서 어제 산 시계가 영수증에 안 나왔다고, 바코드가 있는 케이스를 가져왔으니 다시 찍고 계산해달라고 했다. 점원이 보통은 안 돌아왔을 거라면서,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맨날 오는 가게인데 어떻게 그냥 꿀꺽하느냐고 난 웃었고.

피같은 내 돈을(ㅠㅠ) 내고 나오면서 그 점에 대해 생각을 했다. 역시 애가 좀 약지 못한 걸까. 어려서부터도 그랬고, 꽤 최근에도 애가 왜 그렇게 우직하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 일도 먼지가 뿌옇게 덮여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시계들 상태를 보면 그냥 어디선가 재고를 떨이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데, 내 일처리가 너무 고지식했던 걸까.

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는 가게라서 맨날 드나드는 곳인데, 모르고 지나갔다면 모를까 알면서 점원들에게 태연하게 대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그 당당하지 못함은 내게는 15불보다 훨씬 큰 불이익이라고 느끼기도 했고, 또 내가 마음에 들어서 산 물건인데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정말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운 좋게 얻은 공짜 시계로 넘어갔다면 지금처럼 저 시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국 좀 미련한 데가 있어도 이게 내 방식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원리원칙대로, 답답하게, 미련하게, 우직하게 나답게. 다른 방식은 불편하기만 하니까.

(근데 그런 상황에서 정말 사람들이 보통 돌아가서 계산 안 하나? ;; 내가 정말 캐우직한 거?)
2008/07/30 08:50 2008/07/30 08:50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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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08/07/3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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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Xenosia 2008/07/30 09:00  수정/삭제  댓글쓰기

    훌륭한 법조인의 자세죠! [..]

    • 로키 2008/07/31 06:32  수정/삭제

      정직한 법조인이라니 그런 이상한 (??)

  2. Wishsong 2008/07/30 20:24  수정/삭제  댓글쓰기

    $15 이상의 긍지와 만족감을 산 거라고 생각해 :)

  3. Asdee 2008/07/31 09:15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헤. 저도 학부 때 외부 장학금 받다가 중복 수혜가 안된다는 조항을 알고, 교내에서 받는 것만큼 환급한 적이 있습.... 역시나 고지식하단 소릴 듣긴 했습니다만,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요. :)

    세상 사람들은 좀 약은 수도 써야한다고들 하는데, 길게 보면 우직한 사람들이 정말로 성공하는 것 같더라고요.

    • 로키 2008/07/31 10:43  수정/삭제

      캐우직한 분이 여기 또 계셨군요! ㅋㅋ 맞아요, 그 마음 편한 게 참 크죠. 어쩌면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게 성공의 기반일지도요.

  4. Sihaya 2008/07/31 10:33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번 가고 안 갈 곳이면 모르지만 역시 매일 가는 곳이라면 곤란하죠...
    잘 하셨습니다~ 가슴을 펴고 사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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