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공백

지난 토요일, 그러니까 그저께 저녁은 나비와 강아지군과 같이 보냈다.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이었고 여러모로 좋았는데, 나비가 기억하는 옛날 일이 나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게 있어서 잠시 멈칫했다. 벌써 10년 넘어가는, 엄마 생전에 있던 해프닝. 재미는 있었는데 마치 남에게 일어난 일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10년이 넘었으면 이상한 일은 아니고, 내가 장기 기억에 약한 면도 있으니까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다.

지극히 만족스러운 주말을 보내고 나서 오늘 아침에는 다이어리의 달력을 보는데 '12:00 점심'이라고 표기한 약속의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정도 표기만 보면 누구랑 어디서 약속을 했는지는 떠오르게 마련이니까 당연히 생각날 줄 알았는데, 완벽하게 기억이 안 나서 지난주 월요일 점심약속을 잘못 쓴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러 정황상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었는데도 잘못 쓴 것이길 바랐다. 우중충한 날에 나가기 싫은 것도 있었겠지만, 기억도 안 나면서 뭔가 그 약속이 싫은 느낌이었다.

오전 11시경에 우리 지금 학교로 가는 길이라는 전화가 와서야 그 약속이 누구와 한 것인지 깨달았다. 지난 금요일에 우연히 교내에서 마주쳤던, 엄마와 오래 성가대 활동을 같이 하신 분이 학교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셨을 때 적어놓은 약속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생각이 안 났냐면, 가끔 점심 먹곤 하는 교수님들께 전화를 걸어서 혹시 교수님과 제가 점심 약속 있었느냐고 확인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전화가 안 왔으면 난 누구와 약속이 있는지, 어디로 나가야 할지도 몰랐을 거다.

그분과 역시 엄마와 같이 성가대 활동 하신 엄마 친구분께는 점심을 잘 얻어먹었고,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두 분이 종종 엄마 얘기 하신다는 얘기 들으면서 난 엄마 얘기나 생각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엄마 기억이 모두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기억 자체가 뚜렷하지 못하고 단편적이다. 기억이 나도 언젠가 본 영화처럼 먼 느낌이 들고. 그냥 나에게 어머니가 있던 적이 있었다는 실감이 안 난다.

또 하나, 이건 기억에 대한 건 아니지만 지금 책장에는 외할머니가 주신, 엄마가 생전에 할머니께 쓰신 친필 편지가 있는데 이걸 받은지 한 달이 됐는데도 바로 옆에 손이 닿는 책장에 꽂아놓고 아직도 안 보고 있다. 회피행동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일단 의식적으로는 보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있다.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아질 건 더더욱 없다는 묘한 감정적 거리감이 든다.

어쩌면 회복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정신적 절단술을 나도 모르는 사이 착실히 진행하고 있던 걸까? 그게 고통에 대한 무의식적 대응일지도. 이 사실이 슬프다거나 불안하다기보다는 흥미롭게 다가오는 내가 좀 이상한 걸지도 모르지. 역시 아빠 말씀대로 난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정이 없는 애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이 슬프지 않고,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2008/12/01 20:35 2008/12/01 20:35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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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냥마님 2008/12/03 10:48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에겐 감히 손댈수도 없는 기억이라는게 있어. 정없고 차가워서가 아니라 너무 정이 많아서일수도 있지.
    '사양'이란 소설에서 주인공 여자의 남동생이 어머니의 운명을 앞둔자리에서 "다들 어떻게 거기서 지켜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나는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는데"하곤 술마시러 뛰어나가버리지. 나는 그사람 이해해.
    사람마다 아픔을 대하는 방식은 다른거야.... 누군가는 그 속에 파묻혀 있고, 누군가는 그것을 분석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만 보고 그사람이 어떤가를 평가하지...

  2. 고냥마님 2008/12/03 10:48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사람이 너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렇게 신경쓰지 말아. 그들은 그저 '지독히 너를 오해하고 있을 뿐' 이니까.

    두근거리는 사랑을 할 줄 아는 너는 분명 내가 아는 따뜻한 사람이니.

    • 로키 2008/12/03 16:39  수정/삭제

      그렇게 생각하니까 한결 뚜렷해지네. 고마워.^^

  3. lainavi 2008/12/11 10:10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맨날 한발 늦게 글을 보는군. 난 그냥 너의 지독한 치매의 한 부분이려니 했어. 왜냐면 그 에피소드는 너랑 내가 몇년 전에도 웃고 떠들며 얘기했던 내용이거든.

    나도 그렇지만, 너도 참 선택적인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야. 우리 둘다 사회생활에서 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기억해 마땅한 자질구레한 기억들을 잊는 다는 것. 남들이 보기에 쓸모없을 기억에는 매우 천착한다는 것. 뭐...그렇게 타고난걸 어쩌겠어. 걍 메모지를 벗삼아 살아야지..

    하지만, 그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은 그런 것들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 네 마음이 차가워서 그런 기억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늘 걱정하는 것처럼(쓸데없는 나만의 기우일 수도 있지만) 너는 어느 부분에 대해서 기억을 완전히 닫아버린 것이 아닐까..혹은 기억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닫아버린 것이 아닐까. 그 시절의 너와 그 시절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그래서 모든 것이 드문드문인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곤했어.

    만일 네가 차가운 사람이라면 그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니 마음이 차가워서가 아니라 네가 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거리를 두고 차갑게 행동해서 차가운 사람인 걸거야. 가까운 사이지만 오히려 일상을 함께 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너와 나의 사이처럼 네가 너 자신과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나 또한 너와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아서 어느 부분 내 스스로에게 마음을 닫아두고 사는 부분이 있어. 그때 한참 MSN으로 너랑 몇시간씩 대화하던 그 시기에도 그렇게 몇년간 닫아두던 부분을 풀어내면서도(주로 그땐 MJ와의 일이었지) 아주 추상적인 언어로 대화를 한다던가..결국 나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뭔가 현학적인 언어를 지껄이며 이별을 고했었지만...

    너랑 그렇게 대화를 한 경우는 제법 그래도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간 경우이고...대부분의 경우 나는 무의식의 세계로 묻어버리는 것 같아. 정말 큰 일은 하나한테도 겨우 두어마디 하고는 엄청나게 긴 잠을 자는 경우가 많아. 꿈속에서 나는 상처를 반복하거나 중요한 내용을 곱씹어. 그러고보면 내 인생에 엄청 중요한 일들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지나갔었어. 일상에서는 말야.

    만일 너에게 풀어야 할 매듭이 있어서 기억의 공백을 불러온 거라면 언제고 풀릴거야. 그건 누가 강요하거나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풀라고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야. 그냥 옆에서 함께하는, 가까운 누군가가, 조금씩 조금씩 그것이 토해져나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지. 다만. 그냥 닫아두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것이 너를 아끼는 내 솔직한 심정인거고.
    빨리 풀릴수록 마음의 짐은 조금씩 더 가벼워질테니까. 지난 몇년간 네가 진 마음의 무게를 짐작이나 하겠냐만은...충분히 버거웠을거라고 생각해. 네가 빨리 허물을 벗고 날았으면 좋겠어.

    • 로키 2008/12/11 16:38  수정/삭제

      네 말대로 누구든지 방어기제는 있게 마련이겠지. 잘 모르는 사이에 뭐가 쌓이고 있을지가 문제지만... 네 말대로 언젠가는 풀릴 일이겠지. 그때 내가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기 바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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