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늘어지게 늦잠 잔 금요일 아침, 추천서 업무 때문에 사무실에 나왔다. 학생 하나에게는 추천서를 줬는데, 약속한 다른 학생 하나는 영 안 나온다. 잊어버린 것 같아서 전화를 해봤다.

나: 안녕하세요, A양. 오늘 추천서 받으러 11시에 오기로 하지 않았어요?
학생: 아~ 같은 시간에 다른 학생하고 약속 있다고 하셨던 걸로 기억해서...
나: (이미 쓴 추천서를 A양, B양 한꺼번에 만나서 주겠다는 뜻이었는데 말이 잘못 전달됐군.) 이런, 말이 엇갈렸던 모양이네요. 나와서 받아갈래요? 아니면 혹시 집에 있는 건가요?
학생: 예... 그래도 제가 가서 받아오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 (그때까지 여기 있긴 싫다) 그냥 내가 직접 제출할게요. 어차피 학교에 있으니까.
학생: 예, 어제 제가 드린 자기소개서도 혹시 같이 내주실 수 있으세요?
나: 그러죠. 좋은 주말 돼요. (그러나 학생은 이미 끊고 있다)
나: (좀 놀라서 끊는다)

말은 얼마든지 엇갈릴 수 있다. 약속 잡으면서 내가 좀 장난스럽게 말했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오늘이 추천서 내는 날이었는데 시간약속이 11시에 안 됐다고 생각했다면 대체 언제 와서 받아갈 생각이었던 건지. 그리고 전화는 어른이 끊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우리나라 예법인데, 역시 외국에서 오래 산 학생이라 그런 부분은 모르는 건가.

A 학생이 크게 잘못한 건 아니지만 약간 화가 나고 당황스러워졌다. 아무래도 상대가 보이는 성의에 따라 나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차이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래서 별다른 악의 없이도 인간관계는 틀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게 화가 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A양을 좀 다르게 보게 된다. 나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같은 장학금에 지원하는 두 학생의 대조도 재미있다. 추천서 받아가는 또 다른 학생인 B양은 미리 나한테 연락하고 직접 찾아와서 증빙서류도 다 주고 추천서도 오늘 또 찾아와서 받아갔는데, 정말로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장학금을 꼭 받아야 한다는 게 팍팍 전해졌다. 반면 A양은 추천서 써달라는 연락도 서류 마감 전날이었던 어제 하고, 나한테 서류 하나 내민 적 없고, 추천서 받을 시간약속이 잡히고 말고도 크게 신경쓰지 않은 거 보면 장학금이 별 필요없는데 한 번 찔러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솔직한 심정이라면 B양은 장학금을 꼭 받았으면 좋겠고, A양은 받든 말든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B양은 가정환경이 정말로 어려운 걸 증빙하는 온갖 서류를 줬었는데, 어떤 서류가 있는지만 보고 돌려줬었다. 경제사정은 어차피 내가 심사하는 것도 아니고, 집안 재무에 대한 온갖 서류를 모르는 사람인 나한테 내미는 성의로 충분했다. 게다가 일일히 찾아오는 성의가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장학금 못 받기라도 하면 내가 직접 학교에 항의하고 싶은 심정이다. A양은? 별로 안 어려운 것 같은데 왠만하면 그 기회는 더 어려운 학생에게 가는 게 좋을 듯? (그리고 재밌게도 나하고 친한 쪽은 A양이고, B양은 장학금 업무로 두 번 만난 것 외에는 모르는 학생이다.)

사람 일이라는 건 결국 사람이 하는 거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예의와 성의, 간절함에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A양의 발전을 위해 얘기해주고 싶어도 과연 좋은 얘기로 들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 내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날 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고. (거의 부모밖에 없지, 사실.) 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내 스승이 있다던가. A양과 B양은 둘다 학생이지만 내 스승이다. 둘 중 하나는 이 상황에서는 반면교사에 가깝지만...
2009/05/22 11:56 2009/05/22 11:56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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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09/05/2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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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Xenosia 2009/05/22 17:39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애들은 강하게 크죠.
    그런데 자생력은 없습니다 [..?]
    뭐 여하튼 인맥인겁니[..]

  2. lhovamp 2009/05/23 11:21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면교사 [...]

    • 로키 2009/05/24 11:34  수정/삭제

      반면교사도 엄연히 스승이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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